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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허무한 마천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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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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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초등학생 시절에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 위에서 처음 삼일빌딩을 봤다. 차 안의 누군가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31층 빌딩”이라고 얘기해줬다. 고가 옆에 솟은 검은 빛깔 건물이 더없이 멋져 보였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개막 때 전체 6개 구단 중 하나가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다른 구단과 달리 모(母)회사 이름이 생소했는데 “삼일빌딩도 갖고 있는 곳”이라는 설명에 더 이상 자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뒤 등장한 여의도 63빌딩은 영화나 사진에서 본 이국적 풍광을 떠올리게 했다. 강변을 달리는 차량, 도도히 흐르는 강물, 그 뒤로 보이는 번쩍이는 빌딩…. ‘3저 호황’과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준비 열기 속에서 너도나도 선진국 진입을 얘기하던 때였다.

지금 잠실에는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가 서 있다. 서울 동남부에서는 안 보고 싶어도 안 볼 수가 없다. 높이 555m의 이 마천루(摩天樓·하늘에 닿는 누각)가 완성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영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된다. 애석하게도 한국의 순위가 점점 뒤로 밀려 가는 OECD ‘국민 삶의 질’ 평가에 1점도 반영되지 않는 일이다.

완공은 올해 말로 예정돼 있다. 기념식에서 가장 기뻐할 사람은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 총괄회장이다. 그에게 이 건물은 29년 숙원 사업이다. 롯데는 1979년 38층짜리 호텔 완공으로 63빌딩이 등장한 85년까지 6년간 국내 최고(最高) 빌딩 소유 기업이었다. 롯데는 2년 뒤인 87년 신 회장의 뜻에 따라 초고층 빌딩 건설 계획을 세웠고 그 결과가 롯데월드타워다. 하지만 완공 기념식에 신 회장과 두 아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지 이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삼일빌딩과 63빌딩을 만든 삼미그룹과 신동아그룹은 90년대에 해체됐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건립 직후 불어닥친 대공황 때문에 ‘엠티(빈)스테이트 빌딩’으로 불렸다. 세계 최고(829m) 건축물인 부르즈 칼리파를 세운 두바이 국영기업 두바이월드는 2009년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마천루의 저주’로 언급되는 사례들이다.

구약성경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고 하자 창조주가 내려와 “이제 그들은 무엇이든 하고자 할 것이다”며 벌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기독교는 이를 인간의 욕심과 교만에 대한 경계로 풀이한다. 높이 쌓아야 할 것은 벽돌이 아니라 신뢰와 덕이라고 신은 가르친다.

이 상 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