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람 속으로] 손놀림 따라 즉흥적으로 바뀌는 마술 “모래와 빛으로 사람들 위로해 줬으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7면


버스방송 ‘얍TV’의 샌드 일러스트 작가 하랑


기사 이미지

‘스페인’을 주제로 샌드 일러스트 작업을 하고 있는 하랑 작가. ‘얍TV’에서 곧 방영될 예정이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퇴근길 버스 승객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운전석 뒤편에 설치된 TV 화면에선 모래로 만든 남산타워가 막 솟아오르는 중이다. 쓱쓱 모래를 모았다 흐트러뜨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광화문이 세워지고 그 앞을 버스가 막아 선다. 버스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지는가 싶더니 그림은 어느새 승객이 앉아 있는 버스 안 풍경으로 바뀐다. “저거 너무 신기하지? 꼭 마술 같아.” 휴대전화에 고정됐던 시선을 잠시 뗀 승객들의 속삭임. 모래를 뭉쳐 만든 ‘YAP TV(얍TV)’ 로고로 끝나는 화면 한쪽에 크레디트가 떠오른다. ‘샌드 일러스트 하랑’.

고졸 후 알바하다 27세에 미대 입학
37세에 내 이야기 하고싶어 회사 나와
유튜브서 샌드 일러스트 보고 푹 빠져
‘정글북’ 예고편 ‘유로2016’ 영상 제작

하랑이라는 이름에다 화면에 비친 손도 워낙 매끈해 여성이라 짐작했다. 2일 경기도 용인 작업실에서 만난 하랑(본명 최종열·43) 작가는 “이름은 그냥 예뻐서 지었다”며 “작품에 손만 나와 다행”이라고 웃었다. 라이트 박스(light box·형광등이 든 유리상자) 위에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샌드 일러스트 작업을 시작한 지는 5년째. 2013년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를 소개하는 샌드 아트 동영상을 선보여 호평받았고 영화 ‘사울의 아들’ ‘정글북’ 등의 예고편과 곧 개막하는 ‘유로 2016’ 홍보영상도 만들었다.

모래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활용하는 모래 그림은 샌드 일러스트와 샌드 애니메이션 등으로 뒤섞여 불리지만 그는 샌드 일러스트라는 말을 고집한다. “애니메이션은 정지된 그림을 빠른 속도로 겹쳐 보여 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화면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담는 샌드 일러스트와는 조금 달라요.” 실제로 그가 하는 샌드 일러스트 작업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결이 관건이다. 하나의 장면이 완성됐다 허물어지면서 다른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모핑(morphing) 기법’이 보는 이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라이트 박스 위 모래를 손바닥으로 쓱 밀어내면 하늘이 밝아 오고 모래가루를 살살 뿌리면 밤이 찾아온다. 손가락으로 톡톡 찍은 점은 별이 된다. “선 긋기, 뿌리기, 찍기, 끌기 등 여러 기법이 있지만 정해진 건 없어요. 그때그때 필요한 손놀림을 즉흥적으로 사용하면서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 내죠.”

기사 이미지

샌드 일러스트 ‘아프리카’의 사자 그림. [사진 하랑]

‘마술 같은’ 모래 그림은 그의 삶도 마법처럼 바꿔 놓았다. 대구 출신인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지만 화가의 길은 생각도 못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이나 식당에서 닥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10대, 20대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뭐가 되려 그러니’였어요. 공부도 못했고, 꿈도 없었죠.” 군 제대 후 스물일곱이 돼서야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홍익대 애니메이션학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게임회사에서 원화(原畵) 그리는 일을 했지만 즐겁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열망이 컸어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던 서른일곱에 무작정 회사를 그만뒀죠.”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헝가리 출신 페렝 카코 감독의 샌드 일러스트 공연을 보고는 마음을 빼앗겼다. 즉시 작은 라이트 박스를 사서 여자의 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그려봤다. 손을 움직이면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살아나 음영과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신기했다. 어릴 때처럼 손으로 모래를 조물조물 만지고 있자니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로 고민했던 긴 방황과 상처가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양한 주제로 작업한다. 호랑이와 공룡,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역사,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가 모두 소재다. 그릴 것이 정해지면 주요 장면을 담은 스토리 보드를 만든다. 하지만 모래에 손을 대면 예상과는 달리 흘러가기도 한다. “모래 그림이란 게 결국 한순간 존재했다 사라지는 거잖아요. 다시 그려도 절대 똑같은 장면이 나올 순 없어요.” 예전에 한 기업에서 비용을 댈 테니 모래 그림의 한 화면을 고정해 액자로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다.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요. 고정되지 않는 것이 샌드 아트의 매력이니까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모래를 찾아 떠난다. “전국 해안을 돌아봤는데 서해안의 대천해수욕장 모래가 제일 곱고 부드럽다”고 했다. 5년 전만 해도 국내엔 샌드 일러스트 전문작가가 거의 없었지만 몇 년 새 작가가 늘면서 여러 행사에서 샌드 일러스트를 감상할 기회가 많아졌다. 하랑 작가는 “모래와 빛이 만들어 낸 따뜻한 감성이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를 선물했으면 한다”며 “앞으로 모래는 물론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해변에 솟아오른 계단? 사실은 모래에 그린 평면 그림

‘샌드 아트’의 종류는 다양하다. 바닷가 축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래 조각이 대표적이다. 모래를 물과 섞어 단단하게 다진 뒤 성이나 인물 등을 새긴다. 작품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조각 위에 친환경 접착제를 뿌리기도 한다.

해변을 캔버스 삼아 거대한 모래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도 있다. 뉴질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집단 ‘3DSD(3D Sand Drawing)’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작품은 마치 3D 입체모형 같다. 해변 위에 계단이 솟아오르거나 다이빙대가 설치된 것처럼 보이지만(사진) 실제로는 모래 위에 그린 평면 그림이다. 이들은 “파도가 밀려오면 사라지는 우리 작품은 삶의 덧없음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모래 테이블에 그림을 그리는 샌드 애니메이션은 헝가리 작가 페렝 카코(66)가 1980년대 시작했다. 점토·종이 등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한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그는 94년 샌드 애니메이션 ‘애시스(Ashes)’로 제4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황금곰상을 받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