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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금융 수술은 빠진 구조조정 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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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지난 8일 조선·해운 구조조정 대책을 발표했다. 11조원 규모의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하고 수출입은행에 1조원을 출자하는 등 모두 12조원을 구조조정에 쏟아붓겠다는 내용이다. 필요한 돈 중 10조원은 한은의 발권력으로, 2조원은 정부 보유 공기업 주식 출자로 충당키로 했다. 한은이 새로 돈을 찍어내든, 정부 보유 주식을 내놓든 따지고 보면 결국 국민의 돈이다. 바라보는 눈길이 고울 리 없다.

이를 의식해선지 정부는 부실의 직접 당사자인 조선과 해운 회사들에 대해 강도높은 자구노력을 요구중이라고 강조했다. 사람과 설비를 줄이게 하고, 대주주 경영권 포기와 사재 출자도 독촉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주주이면서 채권은행으로서 제 역할을 못한 국책은행에도 책임과 고통을 분담시키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인력을 각각 10%, 5% 줄이고 지점도 10~30% 없애 몸집을 축소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그나마 4~5년에 걸쳐 찔끔찔끔 줄여나가겠다고 한다. 이들 은행이 대주주거나 주채권은행인 회사들에게 낙하산을 내려보내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임금 삭감이나 동결, 경비 3~10%  절감 같은 내용도 포함됐다.

문제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투적인 대책이다. 조선·해양 부실이 지금처럼 커진 근본적인 원인은 국책은행이 제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책은행 직원이 많고 경비를 많이 써서가 아니다. 대우조선해양만 해도 대주주이자 채권자인 산은이 응당 해야할 관리·감독은 소홀히 한채 퇴직자를 낙하산으로 보내는 데에만 열중했다. 기술이나 수익성, 회생 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도 없었다. 정부가 말한 '상시적 구조조정'은 사실 '상시적 폭탄 돌리기'였다는 게 명백히 드러났다. 이런 진단과 대응이 반복되고, 국책은행들이 계속 메스를 쥔다면 구조조정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너무 뻔하다. 국책은행을 포함한 정책금융을 정부가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논리로 좌우해왔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벤처 활성화',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모두 정책금융을 통한 대대적인 자금 투입을 통해 추진됐다. 성과와 실효성보다 정치적 명분과 대통령의 의지가 더 중요했다. 부실기업 정리는 실업과 경기침체로 정권의 치적이 가려질 것을 우려한 집권세력에 의해 번번히 미뤄졌다. 조선·해운업 위기만 해도 어제오늘이 아니라 8년 전 2008년 금융위기 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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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유증이 정책금융 과잉이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014년말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책금융 비중은 7.33%에 이른다. 미국(0.45%), 영국(0.03%)보다 월등히 높고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의 세배가 넘는다. 산은·수은·기업은행,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무역보험공사·자산관리공사가 각기 대출이나 보증, 보험 업무를 취급한다.

소속 부처도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산업자원부로 제각각이다. 실적 경쟁과 중복·겹치기 지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유령회사나 다름 없던 모뉴엘이 조 단위의 무역사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가 묻지마 지원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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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일 수록 정책금융에 의존하는 기현상도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산은의 지난해말 대기업 대출 비중은 66.8%, 수은은 58.6%에 달한다. 2007년말 각각 61.3%, 36.5%에서 큰 폭으로 증가했다. 민간 은행의 대기업 대출 비중(10.2%)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다. 조건이 좋은 정책금융에 기대려는 대기업과 실적을 높이려는 정책금융기관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부실 대기업을 정리하지 않고 정책금융을 통해 연명시켜온 정치적 판단도 한몫을 했다.

대기업 의존을 줄이고 스타트업과 신성장 산업을 키워야 할 시대적 과제와 거꾸로 간다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정책금융과 그 산물인 좀비기업이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라는 지적도 있다. 멀쩡한 기업마저 위기로 몰아가고 민간 금융이 성장할 여지를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책금융 수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해운 구조조정으로 기업 수와 규모가 줄어들지 몰라도 정책금융은 오히려 비대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 대책에서도 벌써 산은 내에 구조조정자문단을 신설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기능과 역할을 본질적으로 줄이지 않는 한 지금 줄인 인력과 경비도 슬그머니 다시 늘어날 것이다.

정권은 지나가지만 정책금융의 실패는 영원히 국민 부담으로 남는다. 현 정부부터 국민과 국회의 감시·통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 정책금융을 입맛대로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구조조정이 제대로 되고 한국 경제가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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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를 거듭해온 정책금융 수술
산업은행이 설립된 건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이다. 주로 외자를 통해 경제 개발 자금을 조성해 유망 산업에 빌려주고 도로·철도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1990년대 경제성장 속도가 줄어들고 대기업 대출 수요가 줄면서 산은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커졌다. 글로벌 업무와 투자은행 기능 강화가 논의되다가 97년 외환위기로 중단됐다. 대규모 기업부실이 발생하면서 구조조정이 산은의 새로운 역할로 떠올랐다. 대우조선이 산은 자회사가 된 것도 외환위기 몇년 뒤 대우사태가 터졌기 대문이다.

자연스레 금융과 산업 양면에서 산은은 공룡이라 불릴만큼 덩치가 커졌다. 민간 은행들의 영역까지 침범한다는 불만이 커져갔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8월 처음으로 정책금융에 대한 검토가 시작됐다. 당시 재정경제부는 ‘국책은행 역할 재정립’ 태스크포스를 꾸려 산은과 수은을 통합하거나 지주회사화, 민영화하는 방안 등을 검토했다. 벤처활성화 정책의 후유증으로 신보와 기보 부실이 확대되면서 두 기관을 통합하는 방안도 고려됐으나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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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때부터 정책금융 개편에 나섰다. 산은에서 정책금융공사를 떼어내 중소기업 지원과 위기 대비를 맡기고 은행분야는 장기적으로 민영화하기로 했다. 기업은행 민영화와 보증기관 통합 등도 검토했으나 중도포기했다. 대기업 지원을 줄이고 중소기업 지원을 강화한다는 애초의 의도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산은이 민영화에 대비해 지점을 늘리고 개인고객을 확보하며 민간 은행과의 마찰이 커졌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도 출범 직후 정책금융 개편을 추진했다. 역할이 중복된 기관과 역할을 통합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산은 민영화를 중지하고 정책금융공사와 재통합한 게 유일한 결과였다. ‘창조경제를 지원하고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시장 안전판 기능을 강화한다는 정책적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2013년 현오석 당시 부총리가 수은과 무역보험공사 통합을 언급했으나 산업자원부의 강력한 반발로 또다시 무산됐다.

결국 지금까지 일단 만들어진 정책금융기관이 사라지거나 규모를 크게 줄인 적은 한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