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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시선 폭력, 당신도 가해자일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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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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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요즘 젊은 여성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신조어가 있으니, 이름하여 ‘시선 폭력’이다. 원치 않는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것은 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불쾌하다는 뜻이다. 이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다소 섬뜩한 ‘시선 강간’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남성의 음흉한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강간에 준하는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는 의미란다. 논란도 뜨겁다. 지난 2일 한 30대 여성이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는 이유로 70대 남성을 발로 차고 가방으로 때린 사건을 두고 일부 여성이 “할아버지의 시선 강간이 문제”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다.

지난달엔 한 사립대 게시판에 여학생이 같은 대학 남학생을 시선 폭력으로 고발하며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학생은 “쓱 쳐다보는 것과 민망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다르다”며 시선 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남학생들은 “쳐다보는 것도 죄냐”며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만약 이 대학이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였다면? 해당 남학생은 성희롱 혐의로 처벌 대상이 된다. 지난해 “쳐다보는 것(staring)도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학칙에 적시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논란이 일었지만 “쳐다보는 것”과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은 동급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시선의 불편함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이도 있다. 미국의 사진작가 헤일리 모리스 카피에로 얘기다. 거식증에 걸렸다가 갑상샘 기능 저하로 비만이 된 그는 길거리에서 자기를 한심한 듯 쳐다보는 타인들을 촬영해 시선 폭력을 고발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 시선 폭력 문제는 또다시 남녀 간의 대결구도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이 문제는 그러나 비단 남녀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공공장소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받고 마음이 불편했던 경험은 대부분 있을 터. 시선 강간 논란을 예민한 여성의 소음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가 시선의 자유에만 관대하고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에는 둔감한 게 아닌지 돌아볼 계기로 삼아 봄 직하다.

타인의 시선이 불편한 원인은 뭘까. 불문학자 박정자씨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이론을 분석한 저서 『시선은 권력이다』에서 “바라보임을 당할 때 생겨나는 것은 수치심”이라며 이렇게 썼다. “우리가 타자의 시선 앞에서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그의 의식 앞에서 내가 대상, 즉 사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를 위해 “쳐다보는 게 무슨 죄냐”는 질문은 이제, 거둘 때가 됐다.

전 수 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