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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48)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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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호 1 면

정순왕후 가례도감 의궤 중 한 장면. 영조는 66세의 나이로 15세의 정순왕후와 혼인했는데, 정순왕후는 이후 노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조의 가장 큰 정적으로 활동한다. 사진가 권태균

? 1776년 3월 10일. 영조가 승하한 지 5일 후였다. 왕세손 이산(정조)은 경희궁 자정문(資政門)을 나와 즉위식 장소인 숭정문(崇政門)으로 향했다. 사관은 정조가 영조의 죽음에 대해 “슬피 울부짖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가슴 치며 통곡했다”고 쓰고 있다. 영조는 노론 벽파와 손잡고 사도세자를 죽였지만 손자만은 지켜주었다. 작은 외조부 홍인한(洪麟漢)은 넉 달 전인 영조 51년(1775) 11월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다. 이는 노론의 공식 당론이었다.


? 즉위식을 마친 정조는 곧 면복(冕服)을 상복으로 갈아입고 “어둑새벽 이전의 잡범 중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라”는 대사령을 내렸다. 대개 대사령을 내리는 것으로 즉위식 일정은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빈전(殯殿:선왕의 시신을 모신 전각) 밖으로 대신들을 부르라”고 명한 후 즉위일성을 내었다.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


? 대신들은 경악했다. 즉위 일성으로 생부를 거론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인 후 세손도 제거하려 했다. 영조는 세손을 먼저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주었다. 그럼에도 막상 세손의 즉위가 가까워지자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鄭厚謙)과 숙의 문씨의 오빠 문성국(文聖國),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그 오라비 김귀주 등이 즉위 방해에 나서고 노론 벽파 영수 홍인한이 가세했다. 이런 온갖 방해를 뚫고 왕위에 오른 세손의 즉위 일성이 ‘사도세자의 아들’이었으니 노론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대리청정하던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정상적인 정치체제를 정상적 정치체제로 바꾸는 것이 조선과 그 자신을 위한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 ? 정조는 즉위 직후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숭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고쳤다. 그는 더 이상 생부에 대한 추도사업에 나설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노론의 의구심을 풀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도세자 편지 경남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데라우치 문고’ 중 일부에 포함돼 있다. 일본 야마구치 현립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가 1996년 그중 일부가 경남대 박물관으로 환수됐다.

? 문제는 정조의 즉위를 저지하려 한 노론 벽파에 대한 처리였다. 이들은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기도 했다. 홍인한·정후겸·김귀주 같은 인물이 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노론 벽파의 영수 홍인한을 처리하지 않고는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정조는 일단 기다렸다.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먼저 성토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즉위 보름째 사헌부 대사헌 이계가 청대(請對)해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탄핵했다. 정조는 정후겸을 경원부(慶源府)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홍인한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했다. 정조는 “하찮은 정후겸에 대해서는 강도나 절도가 눈앞에서 발생한 것처럼 시급하게 토죄하면서 기세가 하늘에 닿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히 나서는 자가 없다”고 비판했다. ‘기세가 하늘에 닿아 있는 자’는 홍인한을 뜻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동부승지 정이환(鄭履煥)이 “전하께서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이면서 동시에 온 나라가 반드시 주토(誅討:베어 죽임)해야 할 원수”라고 공격하고 나선 인물은 홍인한이 아니라 그의 형 홍봉한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부친 홍봉한은 노론 영수로서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지만 정조의 즉위는 방해하지 않은 노론 시파였다. 반면 홍인한은 정조 즉위를 앞장서 방해한 노론 벽파였다. 정조는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혜경궁 홍씨의 생부였다.? 이런 와중에 영의정 김양택(金陽澤)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후겸 모자의 죄를 성토하면서 홍인한도 공격했다. 정조는 홍인한을 여산부(礪山府)로 귀양 보냈다. ? 영조 47년(1771) 사망한 홍계희는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 중 한 명이었다. 사도세자 사건의 전말을 담은 조선 후기의 야사 현고기(玄皐記)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친정아버지 김한구, 숙의 문씨, 그리고 홍계희 등이 윤급(尹汲)의 종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사도세자를 대역(大逆)으로 고변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홍계희는 우연이 아니라 사전 계획에 따라 영조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입시한 것이었다. 이들이 주고받은 문서에는 정조의 즉위에 대해 ‘풍색(風色)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비위(脾胃)를 안정시킬 수 없다’는 표현까지 있었다. 정조의 즉위에 구토가 난다는 뜻이었다. 정조는 윤약연과 홍지해를 극변으로 유배 보내고, 동생 홍찬해는 흑산도로 유배 보냈다. 황해도 관찰사 홍술해(洪述海)는 백성의 재산 4만 냥과 곡식 2500석을 착취한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정조의 감형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드디어 삼사는 정후겸과 홍인한의 사형을 요구했고, 정조는 즉위년 7월 5일 “고금도의 죄인 홍인한과 경원부의 죄인 정후겸을 사사(賜死:사약을 내려 죽임)하라”고 명했다. 이로써 정조는 과거사 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섬으로 유배된 홍씨 일족들이 정조를 제거하기 위한 비상수단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269호 2010년 6월 6일 http://sunday.joins.com/archives/4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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