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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힐러리는 트럼프 못지않게 비호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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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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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브룩스
NYT 칼럼니스트

도널드 트럼프가 왜 비호감인지는 다들 잘 안다. 포퓰리즘·인종주의·반페미니즘 등 사랑받지 못할 요소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맞설 힐러리 클린턴 역시 왜 비호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까.

최근 여론조사에서 클린턴의 비호감도는 트럼프 못지않다. 워싱턴포스트 조사에서 클린턴은 트럼프와 똑같이 57%의 비호감도를 기록했다. 뉴욕타임스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4%가 클린턴이 정직하지 못해 신뢰할 수 없다고 답했다. 요즘 클린턴의 지지율은 트럼프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다.

클린턴의 지지율 하락엔 두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우선 얼마 전만 해도 클린턴은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국무장관 시절 지지율은 66%까지 치솟았고 1년 전까지도 50%대를 지켰다. 그런데 지난해 말 수백만 달러를 들여 대선 캠페인을 개시하면서 뚜렷한 이유 없이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미스터리는 클린턴이 나라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이다. 퍼스트레이디, 상원의원, 국무장관의 업무를 열심히 수행했다. 딱히 국민의 비호감을 살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클린턴이 ‘무엇을’ 했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비호감의 원인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여러분은 클린턴이 재미 삼아 하는 일이 뭔지 아는가. 버락 오바마가 재미 삼아 하는 일은 누구나 안다. 골프와 농구다. 트럼프가 재미 삼아 하는 일도 누구나 알 것이다. 굳이 얘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클린턴이 재미 삼아 하는 일은 알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클린턴을 소개할 때 사람들은 그의 공적인 역할만 언급하게 된다. 지난해 11월 클린턴이 대통령감인지 알아본 집단 인터뷰가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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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은 클린턴을 묘사하면서 그의 직무와 관련된 단어만 썼다. “클린턴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치운다” “조직적이고 속임수를 잘 쓴다” 같은 식이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클린턴의 삶이 일과 경력, 출세에 장악돼 있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남편도 같은 정치인이고, 딸은 클린턴 재단에서 일한다. 클린턴의 친구들은 성공한 사람들만 모이는 파티장에서 만난 사람이 전부다.

클린턴의 측근들은 클린턴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클린턴을 접해보지 않은 보통의 미국인 입장에선 ‘정치인’이란 이미지 외에 클린턴의 인간적 면모를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인들에게 클린턴이 인간적으로 느껴진 대목은 그가 자신을 ‘할머니’로 지칭했을 때뿐일 것이다. 그 밖에 클린턴의 이미지는 이력서나 정책 보고서로만 존재한다.

미국인들이 클린턴에 비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일중독자에게 비호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일중독은 일종의 감정적 자기소외다. 일에만 몰입해 자신을 소모하며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상대방의 인간성도 업무나 자리로 평가한다. 사람이 대인관계에서 갈구하기 마련인 인간적 친밀함의 영역에까지 업무를 개입시킨다. 이런 일중독자는 ‘사람으로 태어나 의사(혹은 기업인이나 정치인)로 죽다’ 같은 슬픈 묘비명 아래 묻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TV에 나타나는 클린턴의 얼굴을 보라. 인간이라기보다 ‘선수(프로페셔널)’란 느낌이 들지 않는가. 클린턴은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다. 늘 부지런하고 계획적이며, 목표에 집중하고 주변에 대해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워싱턴 정치머신에 종속된 하나의 ‘기관’으로 느껴질 뿐이다.

클린턴은 인간적인 면모를 숨기고 공적인 모습만 비치려는 스타일 때문에 사생활에 관심 있고 개성을 중시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 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미국인 대부분이 살아온 경험과도 충돌한다. 미국인들은 업무를 벗어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때 생기를 되찾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 클린턴은 그 반대다. 그러니 당연히 많은 미국인에게 클린턴은 교활하고 권력 지향적인 마키아벨리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출세를 통해 성취감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클린턴에게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무리 멋진 직업이라도 결국 사람을 집어삼켜 소진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안식처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레저 활동, 종교 생활을 하든지 가족과 지내거나 고독을 즐기든지 무엇이든 좋다.

사상가 아브라함 헤셸은 “안식일은 인간이 만든 시간 속의 궁전”이라고 했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니다. 쉬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휴식을 통해 영혼이 고양되는 경험을 얻는 것이다. 조셉 페퍼도 “여가는 활동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라고 했다. 사람을 쥐어짜는 업무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적을 만들고 그 속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즐기는 게 여가다.

클린턴처럼 성공한 사람에게도 이런 안식처가 필요하다. 그래야 단순히 생산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진짜 사람 내음이 느껴지는 정치인이 된다. 이런 안식처를 찾지 못한 대선 후보를 미국인들은 진정으로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
NYT 칼럼니스트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5월 24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