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덕산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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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덕산이씨의 시조는 이존술-.
고려명종때 덕풍호장 (현충남예산군덕산면)을 지낸 연유로 덕산을 본으로 가문을 열었다.
그의 아들 언후는 야인정벌에 공을세워 검교대장군의 벼슬에올랐고 손자 극보도 대를 이어 검교대장군,증손 편은 검교군기감등 3대장수를내며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초기 덕산이씨의 가문을 빛낸인물은 이유실 (전중내급사) 이겸(전리판서) 이사목 (집현전대제학)이영 (판도판서) 등.
벼슬과 도덕과 학문을 면면이 이어가면서 후손들이 크게번창,발상지 덕산을 중심으로전국에 널리 퍼졌다.
시조의 8세손인 영의 네아들 유·퇴·성·격등 형제는 모두 등과를 했으나 고려가 기울고 이성계가 쿠데타로 조선을 열자 여조훈신가문의 의리와 충절을 지켜 초야에 돌아가 묻혔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 유는 조선개국공신의 한사람인 하륜의 간청에 못이겨 대호군으로 벼슬길에나가 동북면 여진족반란진압에 공을 세웠다.
유는 이를 계기로 태종조에 판상주목사·형조참판을 거쳐 함길도관찰사로 재직중 돌아갔다.
임금이 제관을 보내 후히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아우 퇴도 대간의 모함을 받아 두차례나 귀양살이를했으나 이조의랑·참지의정부사까지올라 세상을 뜨자 임금이 예관을 보내 관을 하사하고 장례를 치르게 했다.
또 석·격등 두아우중 석은 중추부사·태사를지냈고 격은 함경도도절제사·강계부사로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중추원사에까지 올랐다.
유의 아들 사맹 (병조판서)과 조카 익박 (관찰사·대도호부사) ,현손 증영(이조판서·명종사부)은 청렴강직으로 일관, 당대의 청백리로 기록됐다.
증영은 조선조5현의 한사람인 이황과 교우하며 존현·정심·신종· 돈효제·목구족·자서민· 여학교·임인재·상기절등 9조삼소문을 인종에게 올려 유명하다.
조선조 성종때 문신인 퇴의 증손 증문은 봉상시정에까지 올라 국조인물지·국조방목· 성종실록등을 펴내 문명을 떨쳤고 그의 조카 순은 성균관사성으로 관천기목수를 제작, 천체연구에 기여했다.
덕산이씨의 큰집인 중시조 유의 후손들이 경북칠곡에 정착,뿌리를 내리기는 조선조세조초기.
그의 손자 운현이 계유정란(단종1년) 때 만경현령을 사직, 순여외가에 칩거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귀양살이하던 금성대군이 부사 이보흠과 단종복위를 밀모하다 발각,사사된 순흥부변란에 연루될 위기를 맞아 처가인 칠곡으로 낙향, 이후 5백여년의 기업을 닦았다.
충신과 역적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난세를 피해 은거한 운현대에 이르러 벼슬을 멀리한 탓인지 후손들의 벼슬은 현령·현감등 외직으로 그쳤으나 그중 그의 현손 규문은 임란당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크게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올랐다.
그밖의 조선조인물로는 이사증·(대도호부사) 이사계 (병조판서) 이지간 (보문각제학) 이침 (이조정랑) 이분 (경상좌도병마우후) 이번(병조참판) 등이 있다.
40여명이 문과급제·음사등으로 벼슬에 올랐고 충효의렬의 가풍을 굳건히 지켜 조정에 널리 알려진 효자·효부·열녀만도 10명을 헤아린다.
특하 중시조 유의 4형제와 그 아들 사맹의 5형제가 모두 조선조초기부터 국록을 먹고 충성을 바쳐 벼슬을 하게되니 세종이 이가문을 가상히 여겨 시한수를 하사해 덕산이씨의 큰 자랑이 되어있다.
그 시는 『고문선주렬조단 근일맹마전가관』 (높은 집안에 많은 자손들이 반열에 참여하여 정사가 밝게 펼쳐진다).
근세엔 구한말 중추원의관 이상만의 아들 종원이 영국케임브리지대에 유학중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하와이로 망명, 안창호·이승만과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1905년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했다.
그의 무덤과 묘비가 아직도 하와이 나루루공원에 있다고 후손이전한다.
덕산이씨는 영남지방에 1천3백여호, 호남지방에 3백여호,서울·충청도지방에 각각2백여호등 전국에 2천여호가 흩어져살고 있으나 그동안 서로 내왕이 끊졌다가 최근 후손들이 가장번창한 영남화수회 (대구 23-6896) 가 숭업록을 간행하면서 일가들을 찾아 조상의 빛나는 얼을 되새기고 결속을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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