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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미인도’ 저작권 승인서 사인, 천경자 필체와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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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위작 논란을 빚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인도’에 대한 고(故) 천경자 화백의 저작권 사용 승인서가 허위로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대미술관 측 허위 작성 드러나
주민번호 뒷자리도 틀리게 기재

본지는 1990년 8월 31일에 작성된 현대미술관의 미인도 복제 발간 승인서를 입수했다. 이는 현대미술관이 같은 해 4월에 시작한 ‘움직이는 미술관’ 사업에 천 화백 작품인 ‘청춘의 문(68년)’과 ‘미인도(77년)’를 전시회에 사용하면서 관련 서류로 첨부됐다. 작가 본인이 자필 서명한 승인서를 근거로 미술관은 두 작품의 포스터와 엽서 등을 제작해 판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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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 가족이 제시한 천 화백의 서명(위)과 현대미술관이 천 화백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한 ‘복제 발간 승인서’(아래). 필체가 완전히 다르다.

승인서에는 작품 제목·제작 연도·규격과 천 화백의 한자명·주민등록번호·전화번호가 수기로 적혀 있고 천 화백의 도장이 찍혀 있다. 수기 부분은 모두 한 사람의 필체다. 그런데 천 화백의 친필 메모들과 비교하면 필체가 다르다.

천 화백의 장녀 이혜선씨는 “어머니는 글씨를 못 쓰는 편이다. 한자도 승인서에 있는 것처럼 또박또박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다르다. 이씨는 “도장도 처음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필적 감정 전문가인 국제법과학감정원 이희일 원장은 “명백히 다른 사람의 필체다. 동의서 필체는 펜글씨를 배운 관공서 직원의 과거 문서 작성 형태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당시 미술관 직원이 작가들에게 받아야 할 저작권 동의서를 임의로 작성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90년 당시 현대미술관 학예관(4급)으로 일했던 박모씨는 전화 통화에서 “(저작권 동의서는) 작가가 직접 쓰고 날인하는 게 원칙인데 직원들이 대충 만들었다. 관행적으로 그렇게 하다가 미인도 때문에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저작권 사용 승인서는 미인도의 위작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단서다. 천 화백의 동의가 있었다면 위작 주장을 잠재울 결정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그러나 위작 논란이 불거진 91년부터 지금까지 이 승인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씨는 “허위로 작성된 저작권 동의서는 당시 감정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유력한 반대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미술관 측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봐 의도적으로 숨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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