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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 옆 컴컴한 주차장 입구…동행한 여경 “나도 무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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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인적 드문 골목길, 건물 내 화장실, 지하주차장, 취객 많은 유흥가….

영등포·신정동·이대앞 야간 순찰
밀폐된 건물이나 으슥한 뒷골목
사람 많은 번화가인데도 불안
가로등 2개뿐인 주택가 300m 길
주차된 차 뒤서 누군가 튀어나올 듯

본지가 여성 500명을 상대로 ‘밤에 다니기 위험한 장소가 어디인지’를 온라인상에서 설문조사 하자 나온 결과다.

지난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여성들의 불안감 수위는 크게 높아졌다. 응답자 중 89%가 ‘한국은 여성이 살기 위험한 나라’라고 답했다. 또 위험한 장소 일곱 군데를 제시하고 복수응답 하도록 했더니 원룸 밀집지역 골목길(443명), 건물 내 공용화장실(341명), 유흥가(326명) 등의 순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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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들을 중심으로 서울경찰청 생활안전계 소속 성다겸(37·여) 경사와 지난 24일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동행 순찰을 했다. 맨 처음 찾아간 영등포 타임스퀘어 인근은 인파로 북적여 크게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 경사는 “이번에 살인이 난 곳도 강남 번화가였다. 사고가 나기 전까진 누가 거길 위험하다고 생각했겠느냐”고 지적했다.

밀폐된 건물이나 어두운 골목길 등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곳에 범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거였다. 실제로 이곳은 여성범죄 취약 지역이라서 경찰이 특별관리한다. 지난해 10월 이 부근의 한 백화점 주차장에서 60대 여성이 40대 남성에게 납치돼 현금 80만원을 빼앗기는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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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경찰청 성다겸 경사·서울영등포경찰서 중앙지구대 차순철 경장과 윤재영 기자(오른쪽부터)가 영등포구의 한 식당에 있는 남녀 공용화장실을 점검하고 있다. 성 경사는 “서울시가 화장실 전수 조사를 통해 위험성을 파악하는 동안 경찰도 안전 대책을 세울 예정이다”고 말했다. [사진 전민규 기자]

영등포 번화가에 있는 건물 중 한 곳으로 들어가니 2층과 3층 사이에 화장실이 있었다. 공용은 아니지만 남녀 화장실이 10㎝ 간격도 안 될 만큼 나란히 붙어 있었다. 1층 식당에 들어가니 남녀 공용화장실이 보였다. 왼쪽에는 남성 소변기, 오른쪽에는 좌변기 칸이 있었다.

식당에서 식사 중이던 임주연(30)씨는 “공용화장실뿐 아니라 화장실이 식당 밖에 있어도 불안하다. 이 식당도 화장실이 식당 안에 있어 선택했다”고 말했다.

오후 10시40분쯤 서울 신정동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여성안심귀갓길로 지정돼 있어 오후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지구대 순찰대원이 일대를 순찰한다.

신정역 버스정류장에서 오르막길을 300m 정도 걸어가니 주택가가 나왔다. 올라오는 동안 가로등은 2개뿐. 길가에 주차된 차가 많아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신정3파출소 소속 순찰대원은 “가로등을 LED 보안등으로 교체하고 폐쇄회로TV(CCTV)를 더 설치하려 한다”고 전했다.

멀리서 부부가 걸어왔다. 부인 채명희(37)씨는 “밤길이 무서워 남편과 같이 귀가하고 있다. 평소 골목이 어둡고 거리에 사람이 없어 수상한 남성이 걸어오면 일부러 돌아간다”고 털어놨다.

오후 11시, 이화여대 원룸촌. 여성 전용 원룸이 늘어선 이대 정문 옆 골목길에서 마침 귀가 중인 여대생 박모(25)씨를 맞닥뜨렸다. 깜짝 놀란 표정의 박씨는 제복 차림의 성 경사를 보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 전 저희 원룸에 사는 언니가 겪은 일인데, 새벽 1시에 어떤 남자가 계속 따라오더래요. 언니가 ‘왜 쫓아와요?’ 하니까 그제야 돌아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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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빠져나와 큰 거리로 나온 뒤 한 건물의 지하주차장 입구를 발견했다. 주차장 역시 범죄에 취약한 장소 중 하나다. 인적이 드물 때가 많고 주차된 차들 사이로 몸을 숨기기도 쉬워서다. 지난해 여성을 납치해 살해한 뒤 트렁크에 시신을 유기한 일명 ‘트렁크 사건’의 범행 장소도 충남의 한 대형마트 주차장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둠이 깔린 주차장 안에서는 기자와 경찰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성 경사는 “이런 곳에서는 무슨 일을 당해도 바깥까지 소리가 잘 안 들리겠다”며 “경찰인 나도 무섭다”고 말했다. 순찰은 자정쯤 마무리됐다. 서울의 밤거리는 여성들에게 결코 녹록지 않았다.

글=윤재영 기자 yun.jaeyeong@joongang.co.kr
사진=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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