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높이 20m…"난공불락"의 고구려 환도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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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구려가 1세기부터 5백년간 수도로 삼았던 집안(오늘의 집안)은 첩첩산중에 있었다. 만주벌판에서 이곳으로 가려면 길은 단 2개.
통화를 떠난 열차는 장백산맥의 준령사이의 오르막길을 2시간 반, 노령을 지나면 좁은 계곡의 내리막길을 약1시간 달려야했다. 이것이 장춘·길림방면에서 집안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무순·심양(봉천)으로 통하는 길은 1595년 청태조「누루하치」(노아합적)를 만나러 간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에 보듯, 집안남쪽에서 산들을 넘어 동가강으로 빠져 부이강을 따르면 여경노성으로 이른다.
강력한 기마군단에 의거한 고구려가 어째서 첩첩산중인 집안에 수도를 두었을까.
역사가들의 관심사로 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지만 건설기의 고구려는 천연의 요새에 의거했어도 무구검(244년) 태용극(342년) 등의 침공을 받아야 했었다.
그러한 국난속에서 독특한 산성에 의거하는 방위전법이 나오지 않았을까. 집안을 돌아보고 환도산성을 답사한 뒤의 필자의 실감이다.
환도산성은 집안의 서북 3km, 통구강을 따라 협곡을 빠져나간 곳에 있었다. 정면의 표고 670m 주봉에서 좌우로 반월을 그리며 내려오는 능선, 그 좌우 능선이 서로 접근하려는 곳은 통구강의 침식으로 높은 절벽을 이룬다. 절벽위의 높이 15∼20m의 성벽이 뚜렷이 보인다. 무구검의 군세가 고전끝에 「수이마현거, 이등구도」했다는 기록이 납득되는 난공불락의 산성이다.
남문은 +자의 옹성으로 파괴된 석재속에 기와파편이 산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동서로 뻗치는 능선위의 성벽, 군데군데 허물어지기는 했으나 화강암의 절석으로 견고하게 구축돼있다.
남문지 저쪽에 우뚝 솟은 고지, 점장대라 불리는 그 곳에 서면 남문과 협곡, 그리고 멀리압록강과 북한의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외적을 무찌른 고구려 병사들의 환성이 들리는 듯하다.
서일본 각지에 산재하는 「조선식산성」을 연구한지 10여년이다. 일부는 고문헌에 축성 목적과 연대가 기록돼 있으나 대부분은 고고학적으로 해명할 수밖에 없으며 만주와 한국의 고대산성과의 비교연구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한국의 산성은 조선조시대까지 보수되면서 계속 사용되어 어디까지가 고대에 축성된 것인가를 구분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환도산성을 찾는 것은 필자의 또 하나의 소원이었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후 (427년) 환도산성은 기능을 상실,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방기동부소장(길림성 고고·문물연구소)에 의하면 성내의 궁성지서 불과 30m떨어진 곳에 5세기의 봉토분이 있어 천도 후 이 성의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말해준다.
환도산성내의 서쪽 경사면에는 수많은 고분이 있었고 .성밖의 평지도 고분군으로 덮여있다. 환도산성일대는 그 후 고구려 사람의 「성지」로 된 모양이다.
우리나라 고대산성을 해명하는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환도산성에 대한 학술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리 일행의 답사는 1∼2시간에 불과했다. 아쉬움만이 앞선다.
환도산성으로부터 집안으로 나와 국내성지를 찾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명왕33년(서기3년)께에 「동십월 천도우국내, 축위나암성」이라고 적혀있어 위나암성(환도산성)은 구축했으나 국내성을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같은 성인가 아닌가를 두고 거론된 지 오래다.
기록에 의하면 집안의 평지성은 1921년에 개축되어 동벽 5백54m, 서벽 6백64m, 남벽 7백51m, 북벽 7백15m의 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근년에 발굴조사한 결과 고구려국내성을 개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고구려시대의 성벽은 동벽과 북벽의 기단에서 볼 수 있고 서벽남쪽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옆으로 긴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올린 것으로 한국의 고대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벽이었다.
성벽의 바깥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라 불리는 돌출부가 있었고 성내의 궁성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태령사년태세□□윤월육일기사조 길보자의손」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태령사년은 326년으로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최고의 기와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5백여년간 고구려의 수도로 번영했던 국내성이 지금은 시가지의 지하1∼2m아래 잠자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하에 있을 때 이곳을 찾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글이 머리에 떠오른다.
『수천원, 혹은 수만원이면 한 개를 파볼 것이라. 그리하면 천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보리라 하는 몽만 하였다. 차실라, 이와 같은 천장비사의 보고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고분과 국내성을 발굴하여 영광의 고구려사 모습을 재조명하려는 것은 단재만의 꿈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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