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의 정치인 대좌…평양측 태도 | 북측, 국회회담을 선전이용속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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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남북국회회담 개최문제를 협의키 위한 남북국회대표들의 23일 판문점접촉은△회담형식△대표단규모△회당장소 및 시기 등 몇 가지 실무사항에 합의함으로써 외견상 상당한 진전을 이룩한 것처럼 보이나 본질문제인 의제에 있어서는 전혀 접근의 기미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뭘 의논할 것인가는 접어둔 채 만날 장소와 사람수 등만 협의한 셈이다.
이날 우리측은 앞으로의 국회회담에서 「통일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민족통일협의회의 기구를 구성하는 문제와 이에 따른 통일기반조성에 필요한 사항을 다루자」고 한데 대해 북한측은 「불가침공동선언을 최우선 의제로 하자」고 맞섰다.
불한은 우리측의 통일헌법제정문제도 토의할 수 있다고 하는 등 외견상 융통성 있는 자세를 보였지만 이 역시 이 문제를 정말 다루겠다는 자세라기보다는 불가침선언문제를 끌어가 보자는 속셈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북한이 비교적 용이하게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체육 문화회담을 외면하면서 가장 어려운 정치회담을 고집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미국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북한의 목표가 미-북한간 평화협정체결과 이에 따른 주한미군철수에 있는 만큼 남북한간에 불가침선언문제의 논의자체가 대미접촉의 분위기조성에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원래 불가침협정이나 선언은 책임 있는 당국간에 채택할 일이고 국회는 이를 심의· 비준하는 게 당연한 일임에도 거꾸로 국회간에 이런 문제를 먼저 다루자는 엉뚱한 제안을 하는 것은 결국 대외적 선전을 노리는 것이요, 3자 회담 내지 미-북한회담의 명분을 얻어내려는데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둘째, 정치회담을 통해 저들의「우월성」 을 내보이고 김일성 부자의 찬양장소로 쓰려는데 있다.
그들은 바로 며칠 전 남북한이산가족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교환방문 문제협의 때 우리측의 「고향방문」 제의를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대화와 교류의 의사가 없음을 입증했는데 가장 기본적이고 쉬운 일을 못하면서 가장 어려운 정치적 회담을 들고 나온 것은 목적이 딴 데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셋째, 우리 국내가 야당의 민주화요구 등으로 논란을 벌이는 것을 이용해 통일논쟁까지 유발시켜 국론분열을 획책해보려는 저의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은 6·25를 도발하기 불과 며칠 전 남북정당 사회단체협의회 개최, 남북국회연합 등을 제의했고 이후 4·19, 한일회담반대데모 등 우리사회가 혼란에 빠질 때 유사한 제의를 한 전례가 있다.
북한측은 당초 회담에는 국회연석회의방식과 국회대표회담방식이 있다면서 「각 정파의 국회의원들이 다수 참가해 대화를 민주주의적 기초에서 진행할 수 있고 각계각층의 의사를 폭넓게 반영할 수 있는」 연석회의가 좋다고 했다.
이들이 말하는 연석회의는 한쪽의 국회의원 (북측은 최고인민회의대의원) 들이 다른 쪽의 국회에 똑같은 권한과 의무를 가지고 참석해 발언권과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원래는 국회의원 전원이 연석하는게 이상적이지만 쌍방 국회의원수도 차이가 있고 회담운영에 불편함도 있으니 1백명 정도로 하자고 했다.
곧 이 안을 철회하기는 했지만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자는 것이 아니라 군중집회와 같은 떠들썩한 정치선전무대를 갖자는 데 북한측의 저의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비현실적 발상과 불순한 동기가 뒤얽혀 있기 때문에 북한측이 우리측의 일부 실무사항에 관한 제안에 동의를 해왔지만 근본적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어 국회본회담에 이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예비접촉은 분단40년만의 첫 정치인들의 접촉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적십자 경제회담과는 달리 통일문제 등 포괄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북한측이 이를 정치선전과 자기들의 3자 회담추진을 위한 분위기조성용으로만 이용하려드는 자세를 앞으로도 계속 견지한다면 회담의 장래는 어둡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행정부간의 논의사항이 돼야할 불가침선언문제를 입법부간의 회담에서 다루자는 그들의 주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진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몇 차례 접촉은 더 이어질지 모르나 이 회담의 결실여부는 전적으로 북한측 태도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김현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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