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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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20번째 총선이 끝났다. 햇수로는 제헌국회가 구성된 이후 69년째다. 6번 넘게 강산이 변할 동안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지금 삶이 팍팍하니 바꿔보자’라는 선거 메시지다. 1950년대 ‘못살겠다, 갈아보자’로 시작해 ‘정책실패, 정권심판’ 등에 이르기까지 표현 방식과 디테일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 국민이 행복하지 않으니 바꾸자는 내용에는 변함없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 국민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행복한 적이 없었던 걸까?‘

외국선 한국 성장 부러워하는데
우리 국민 행복감은 하위 수준
돈 중시하고 성취기대 너무 높아
가족·건강·취미의 가치도 새겨야

사실 여러 국제조사에서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높은 편이 아니다. 지난해 유엔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58개 국가 중 47위를 기록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생각한다면 낮은 수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외국인들과 대화하면 오히려 우리나라를 부러워하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한강의 기적’은 물론이고, 경제위기도 빨리 극복하고 견실하게 성장을 하고 있다는 말과 삼성·현대차 등 세계적인 기업들에 대한 이야기도 단골 멘트다. 그러고 보면, 가구마다 자동차를 한 대씩 보유하고 있고, 인구의 약 3분의 1이 매년 해외여행을 가는 나라도 흔치 않다. 또 한국 방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깨끗한 길거리와 세계적 수준의 치안에 만족하며 엄지를 내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밖에서 보는 것과 국민이 안에서 느끼는 행복감 사이에 ‘미스 매치’가 발생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먼저 행복을 판단하는 잣대가 획일화돼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돈’을 행복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 여긴다. 한 여론기관의 조사결과에서도 ‘행복은 돈과 관계 없다’고 답한 한국인이 7%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호주는 2배가 넘는 18%, 덴마크는 47%에 달했다.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등산을 할 때도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기보다 다른 등산객의 의류 브랜드가 얼마짜리인지에 더 신경을 쓴다.

‘행복 미스 매치’의 또 다른 이유는 목표치가 너무 높다는 점이다. 웬만한 수준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중산층은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정의에 따르면 중산층은 ‘중위 소득의 50~150%’에 해당한다. 지난해 연소득 범위로는 약 2500만 원에서 7600만 원, 4인 가구 기준 중위 소득은 연봉 5000만 원이다. 그러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위와 같은 통계적 중산층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데 동의한 사람은 19%에 그쳤다고 한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조사했더니 고등학생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1위가 돈, 2위가 성적이었다.

경제학에서는 경제적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희소성(Scarcity)’ 때문이라고 본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서다. 그러나 이는 돈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족·건강·취미 등 인간의 행복을 충족시킬 자원은 다양하다. 국민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의 가치를 재산으로만 본다면 그 어떤 위대한 정치가, 천재 경제학자가 나타나도 해결하기 어렵다. 모두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부(富)를 축적하고, 모두가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보니 밝은 햇살과 푸른 잔디가 펼쳐진 공원에서 공놀이를 하는 가족들, 삼삼오오 모여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것이 바로 행복이구나’를 느낀 적이 있다. 지난해엔 SNS를 통해 ‘국가별 중산층의 기준’이라는 그림을 지인에게 전달받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급여·집 평수·자동차 등 모두 재물과 관련된 반면, 미국·프랑스 같은 선진국은 외국어·스포츠·악기를 할 줄 알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등 비물질적 가치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면 고개가 끄덕여졌다.

건강을 잃으면 모아둔 돈도 아무 의미 없듯, 돈은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갖춰졌을 때 그 의미가 크다. 행복을 오직 하나의 잣대로만 보지 말자. 오늘부터라도 행복의 가중치를 재산보다는 화목한 가정에 두면 어떨까? 가정의 달 5월이다. 지금 사랑하는 딸, 아들에게 잘 지내느냐는 안부 문자라도 넣어야겠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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