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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4) 제82화 출판의 길 40년(6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나는 여기서 지난 40년간 한국출판과 교육도서의 저술이란 측면에서 그 소장을 같이한 검인정도서의 파동과 수난을 회고해 본다.
당시 미군정 문교부는 초등교과서는 국정으로 정했다. 국정이란 문교부가 저작권을 갖고 생산 공급하는 제도다. 그리고 중·고등교과서는 국내의 학자와 교육자들이 문교부 교육방침과 교육과정에 따라 저술한 것을 심사 기준에 합격하면 그 책을 각 학교에서 임의로 선정, 채택하도룩 한 제도다.
여기서 출판사가 검인정교과서 출판을 하는데는 먼저 훌륭한 저자의 확보가 있어야하고 다음은 대량생산에 쓰이는 자금이 준비되어야 하며, 판매 실적을 올리기위한 채택경쟁이 자연 따르게 마련이었다.
6·25피난시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문교부 편수국은 묘심사절간이었다. 당시 백낙준문교부장관은 전시 교과서 공급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검인정교과서공급회사의 설립을 동의했다.
당시 출판계의 자력만으로 53학년도 검인정 교과서 생산과 공급은 불가능이란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출판계는 문교부의 지도로 검인정회사를 발족시키고 교과서 생산자금은 한국은행에서 교과서 대금을 미확정채권담보로 하여 융자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앞에서 말한 교과서 채택운동이 빚은 업자간의 알력으로 57년3월께 수사당국에 회사의 부정이 있다하여 회사간부를 비롯한 관계피의자 39명이 입건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곧 수습되었으나 회사는 수개월간 공백기간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다. 당시 문교부 최규남장관과 고광만차관으로부터 나를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종로의 어느 음식점이다. 그 자리에는 장·차관 이외에 김유택 한은총재도 동석하고 있었다. 나는 이분들의 권고로 공백상태에 빠져 있는 교과서회사를 강권에 못이겨 재가동하는 임무를 1년간 맡으면서 잠시 사장이 된 적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속된 이 회사는 59년도에 자유당의 3·15부정선거 자금조달을 이유로 당시 최인규내무장관으로부터 1억5천만원의 정치헌금을 강요당하고, 4·19후에는 민주당 정권으로부터 또 동액의 정치자금을 징발당했다.
또 77년 공화당의 유신체제에서는 누탈세금 이란 이름으로 1백27억원의 천문학적인 큰 돈을 주주 출판사 1백14개사에 고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검인정 업권을 당장 그 다음해부터 빼앗겼다. 그런데 이 탈세사건을 계기로 79년도에 2종교과서 (종전의 검인정교과서) 실시 방안을 공고했는데 종전까지는 「국어」를 제외한 중·고교용 교과서 전부가 검인정이던 것을 중학교 전과목과 실업계 고교과목을 고스란히 국정으로 바꾼 이변이 일어났다. 당시 이 이변에 대하여 학계와 출판계는 이것은 교육의 획일화를 부채질한다는 입장에서 반대 여론이 높았으나 이 정책 이대로 강행되었다.
또 77년의 탈세액 고지사건은 영세한 출판사에 큰 충격을 안겨 주어 그 쇼크로 6, 7명의 타계한 사람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냉정을 되찾은 출판계는 78년부터 국세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84년에 대법원승소판결이 확정되었으나 국세청은 다시 그 세금을 재고시하여 출판계의 정당한 요구에 불용하고 있어 업계는 똑같은 소송을 다시 제기하여 계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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