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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장서 쫓겨난 박승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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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광주광역시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식’이 반쪽이 났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기념식장 내 자기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야당 인사와 유족들이 노래를 부를 때 황교안 총리와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다문 채 태극기만 흔들었다.

유족들 ‘임을 위한…’ 제창 불허 항의
보훈처 “입장 거부 사태에 깊은 유감”
야당은 “ 합창만 허용한 건 옹졸·아집”

18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기념식에는 황 총리를 비롯해 정의화 국회의장,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안철수·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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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춘 국가보훈처장(왼쪽)이 18일 오전 유족과 시민들의 거센 반발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광주=프리랜서 오종찬]

오전 9시58분쯤 기념식장으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로 가려던 박 보훈처장은 순식간에 5·18 유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황 총리가 자신의 자리로 가 먼저 앉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복을 입은 유가족들은 “박승춘 물러가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여기에 올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박 처장은 3분가량 행사장 진입을 시도하다 결국 행사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박 처장은 기자들과 만나 “저를 (참석) 못하게 한 것은 대단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이 열리기 시작한 2003년 이래 국가보훈처장이 기념식장에서 쫓겨난 것은 처음이다.

이후 국가보훈처는 보도자료를 내고 “5·18 단체 일부 회원들의 저지로 국가보훈처장이 입장을 거부당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며 “정부가 왜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과 제창을 결정하기 어려운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념식장에 참석한 정치인들도 여야를 막론하고 5·18 유가족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유족들은 새누리당 정 원내대표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관련해) 협조 하나 안 해준 사람이 뭐 하러 오느냐”고 소리쳤으며,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에게는 “이 문제를 풀지도 못하냐”고 질책했다.

현장 분위기 때문인지 정부가 ‘합창’으로 규정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사실상 ‘제창’이 됐다. 노래가 시작되자 김종인·안철수·천정배 등 야당 대표들은 물론 새누리당 정 원내대표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노래가 시작되자 퇴장했다.

행사가 끝난 뒤 국민의당 김성식 정책위의장은 현 정무수석을 향해 “말이 안 되는 행사다. 이게 무슨 광주 민주화운동 행사냐”고 항의했다. 김 정책위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 묘지 앞에서 “진짜 미안합니다”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더민주 김종인 대표는 “정부가 너무나 옹졸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합창만 허용하는 건 아집에 사로잡힌 결정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보수단체의 퇴장에 대해 “국민통합에 저해되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도 행사에 참석했다. 앞줄에 착석해 있던 안 대표는 뒤돌아 문 전 대표와 악수했다.

광주=안효성·박가영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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