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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 평등 사회에 기여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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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31면

조선이 건국된 지 6년째인 1397년 5월15일(음력 4월 10일), 훗날 세종대왕으로 추앙되는 이도가 태어난다. 왕이 될 순번이 아니었던 정안군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 4대왕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세종은 고질적인 눈병에도 책을 놓지 않고 닦은 학문과 뛰어난 자질로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에는 ‘어리석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세종의 마음이 절절히 담겨있다. 조선 건국의 사상적 기틀인 유학에서 왕을 백성의 어버이로 보고 있으니, 세종의 이러한 마음은 어진 군주로서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국가가 부모와 같은 관점으로 국민에게 강권하는 것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교육이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교육을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정하고,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공교육 제도가 유학과는 무관한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에서 18세기 말에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프로이센 교육제도’는 유럽 전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미군정에 의해 근대적 교육제도가 도입된 우리나라에서 프로이센 교육제도가 정착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프로이센 교육제도의 특징은 의무교육(따라서 무상교육), 사범학교을 통한 교사 양성, 전국적 학력 평가, 학년별로 정해진 교육 과정 등이다.


세계적으로 확산될 선진적 교육제도가 어떻게 당시로서는 후진국이었던 프로이센에서 정립된 것일까. 이렇게 획기적인 ‘개혁’은 역설적이게도 프로이센이 절박한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미 18세기 초부터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은 제국주의적 식민지 개척에 돌입하고 있었고, 18세기 중반에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프로이센은 현재 독일 지역에 존재하던 많은 나라들 중 가장 큰 나라였고, 대표적인 계몽군주 중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치세로 크게 성장하긴 했지만 열강의 반열에 끼진 못하는 상태였다.


프로이센의 부유한 상공계층은 국력 신장을 위해선 전 계층으로의 교육 확대가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교육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들의 열망은 위 아래 양쪽으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귀족들은 글 읽는 사람이 늘어나면 자신들의 지위가 불안정해질 거라 반대했고,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생계에 필요한 자녀의 노동력을 교육에 뺏길 것을 걱정했다. 반대를 잠재울 수 있었던 계기는 더 큰 위기에서 왔다. 19세기 들어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크게 패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추진된 교육 개혁에는 다양한 애국적 요구가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자이자 나치주의의 정신적 아버지라 불리는 피히테는 교육의 목표가 ‘선생님이 심어준 것 외에는 평생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도록’ 학생의 인성을 바꿔놓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훔볼트의 이상은 상식을 배양하는 포괄적 교육과 신분이나 직업·재산에 얽매이지 않는 학문적 자유였다.


프로이센 교육제도가 형성된 배경이 무엇이었든, 제도가 다른 나라로 급속히 확산될 때에는 그 효과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교사가 국가 차원에서 표준화된 지식을 군대식 상하관계로 학생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효율성에 있어서 당시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신분과 관계없는 무상 의무교육은 평등한 사회 조성에도 분명히 기여했다. 문제는 이러한 교육제도가 현재에도 유효하냐는 것이다.


어떤 국가 제도의 당위성은 보통 효율성과 형평성으로 평가한다. 즉, 공교육이 교육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효과적인지,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육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학생의 능력 개발과 바람직한 시민의 육성이다. 능력 개발에 있어서 프로이센 교육제도는 창의성이나 개인적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공장식 교육’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시민정신의 배양에 있어서도 비판은 만만치 않다.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의 원래 영어 명칭은 ‘normal school’인데, 이는 규범(norm)을 가르칠 사람을 위한 학교라는 뜻이다. 즉, 프로이센 교육제도에서 규범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가치인 것이다. 그렇게 전달되는 규범이 무엇인가도 문제지만, 일단 방식이 민주적이기 어렵다.


공교육이 평등한 사회 조성에 기여하는지는 더 복잡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무상 의무교육에 의해 교육 기회가 같은 것은 보편적으로 맞지만, 교육의 성과는 결코 같지 않다. 학교를 오게 할 수는 있어도 공부를 하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대규모 사교육이 끼어들어, 어디까지가 노력과 능력으로부터의 차이이고 어디까지가 돈으로부터의 차이인지 모호해 모두가 마음 불편하다. 사교육까지 포함한 교육 기회가 절대 평등할 수 없고 교육의 성과는 애초에 평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니, 교육이 평등한 사회 조성에 기여할 시절이 다시 올지 의심스럽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우리나라는 꾸준히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흔히들 100등에서 50등 되는 것보다 20등에서 1등되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한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한 단계 오르기가 더 힘들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같은 노력으로 기대할 수 있는 성과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작아진다. 아마도 우리나라는 추가적인 교육 투자로 얻을 것이 거의 없는 포화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교육제도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려워도 최소한 돈은 아니리라 생각되는 이유다.


스승의 날을 세종 탄신일로 정한 것에 어떤 깊은 뜻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부가 공교육에 대해 갖는 관점이 세종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어리석지 않은 국민을 제대로 위할 설득력 있는 공교육 개선 방향이 제시되기 바랄 뿐이다.


민세진


동국대?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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