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도들이 총들고 전장서 산화|육사10기 생존동기들이 찾아본 격전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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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저 소나무 아래서 최정훈생도가 숨졌고 바로 그 옆쪽이 장만근생도가 자결한 자립니다.』
경기도 포천군내촌면팔야리, 6·25당시 육사10기생도대가 퇴계원으로 진격해들어오던 북괴군 제34사단9연대와 맞부딪쳐 한나절의 격전을 치른 현장.
6·25 설흔다젓돌을 앞두고 이제는 반백이 된 그날의 젊은생도들이 그 현장을 찾았다.
『50년6월24일 우리는 졸업전 마지막 외박을 나갔습니다. 일요일(25일) 아침방송을 듣고 허겁지겁 학교로 돌아가 하오4시 바로 전선에 투입됐지요.
김재명씨(54·예비역 소장·서울지하철공사사장)는 그들이 첫 전투를 치른 곳이 팔야리였다는 사실도 전쟁이 끝난뒤 알았을 정도로 허겁지겁 동원됐다고 회고했다.
26일 상오10시.
방어진지 전방 4km까지 정찰을 나갔던 최정훈생도가 돌아와 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끝내는 순간 적의 첫번째 포탄이 생도대진지에 떨어졌다.
잠시후 개미떼같이 몰려오는 적보병이 사정권에 들어왔다.
소총과 박격포 등을 동윈한 혈전이 반나절 계속됐다.
생도대의 첫희생자는 공교롭게도 적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던 최생도.
하오4시. 의정부가 적의 손아귀에 멀어졌다는 연락과 함께 생도대의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적탄에 우측 대퇴부 관통상을 입고 동기생에게 업혀 하산하던 장만근생도는 자신때문에 동료가 낙오될 것을 염려해 스스로 M1소총을 당겨 목숨을 끊었다.
어떤 생도는『육사생도에게 후퇴란 있을수 없다』며 진지에서 나오지않고 버티기도했다.
이 전투에서 산화한 10기생도는 모두 65명. 임관전의 사관생도를 실전에 투입해 장교아닌 전투원으로 소모해버린 것은 세계전사에도 예가 없는것으로 지금도 군지휘부의 큰 실책으로 지적된다.
태능 사관학교로 일단 철수했던 10기생들은 다시 수원·오산전투를 치르면서 7월10일 대전까지 후퇴, 그곳서 임관식을 가졌다. 당초 입교생이 3백13명이었으나 임관식에 참석한 생도는 전사상자를 빼고 불과 1백34명.
『졸업장을 만들지못해 생도대표 1명에게만 붓으로 쓴 졸업장을 주었고 계급장 수여는 생략됐습니다. 흰반창고를 찢어 철모에 이른바 「반창고 계급장」을 달았지요.』
현재 생존한 10기생은 모두 1백68명. 황영시감사원장이 10기생으로서는 마지막으로 83년 육군참모총장의 임기를 끝내고 군복을 벗어 이제 현역은 한명도 없다.
「별」을 단 10기생은 대장3명을 포함, 39명.
『우리동기생 가운데 총상이나 파편을 맞지않은 사람은 단 5명뿐입니다. 그만큼 6·25를 혹독하게 겪었지요.』남상선씨(57·예비역대령·학교법인 원석학원이사)는 『땀과 피를 유독많이 흘린 10기이기에 그만큼 긍지도 높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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