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회 「노예제」로 볼수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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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고대사의 노예제 논쟁이 재연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종준 교수(미 로드 아일랜드 주립대·동양사)는 21일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한국 고대노예에 관한 재고」를 발표한다. 김교수는 이날 이병도씨나 일본인 학자 기전위씨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김교수는 두학자의 주장이 『삼국시대 노예는 귀족들의 중요한 재산의 척도가 되고 또 귀족안엔 수천의 노예를 가진 권력자가 존재했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김교수는 이문제의 열쇠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와 일본정창원문서및 간단한 금석문, 중국의 기사외엔 별게 없다고 말한다. 그는 가장 믿을만하나 단편적인 정창원 문서에 의하면 신라의 노예인구는 전체인구의 5·6%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선 「노예가 아닌 농민이 신라생산의 핵심을 형성하고 농민이 국가의 재정과 지배계급의 징수대상이였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대사회의 노예는 가내노예로서 만성적인 전쟁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는 대단히 적였었다고 지적한다.
김교수는 일부학자가 삼국이 노예가 많은 사회로 규정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신당서』의 신라노예에 관한 기사는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 기록엔 한 사람의 재상이 3천의 노예를 갖고 있는 것으로 돼있으나 김교수는 「노동」은 중국에서 발음이 비슷한 「노당」 (활 쏘는 특수부대)의 오기로 보았다.
김교수는 결론적으로 한국 고대사회는 노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으며 본질적으로 농민과 농토를 통제·관리하는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노예제문제는 1933년 백남운씨가 제기했다. 그는 노예제도가 삼국시대의 지배적인 생산 양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60년대초 조기준씨(한양대)가 비판, 일단락됐다. 그후 60년대 중반 김삼수씨 (전숙대)가 다시 노예제사회를 주장했다.
다만 대상을 삼국시대 이전으로 올리고 노예도 서구전형의 생산노예가 아닌 가내노예중심이었다고 한정했다. 이를 김병하씨(계명대)가 반론, 가내노예가 지배적이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사회경제사가들이 활발한 논쟁을 벌이는 사이 정통역사학계에선 별 언급이 없었다. 다만 강진철씨(전주대)가 토지지배관계 차이로 고대·중세등 시대구분하면서「고대적」 「중세적」이란 말을 썼다.
전체적으로 「노예제」 「봉건제」란 용어는 가급적 피하는 분위기다. 북한에선 50∼60년대를 거치는 동안 여러학설이 뒤바뀌였다가 「노예제 사회」로 정착됐다.
이기동 교수 (동국대)는 이러한 「노예제」논의에 대해『시대 구분문제와 관련, 필요한 논의라고 보나 거시적 접근에 앞서 미시적인 연구의 뒷받침이 중요한 실정』이라고 발했다.<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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