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출소가 도둑에게 유린된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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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순사(순사)와 겸상(겸상)한번만 해도 그사람이 마을에서 행세를 하던 때가 있었다. 『순사가 온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치던 시절이었다.
무기를 휴대했건, 안했건 제복만 입고 나타나도 경찰관은 적어도 그만큼 외경(외경)의 대상이었다.
고참경찰관들이 18일 서울 면목동에서 일어난 파출소 피습사건을 놓고 유달리 창피스러워하며 착잡한 표정을 보인것도 바로 그런 시절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인것 같았다. 경찰간부들이 『기사를 좀 작게 다뤄달라』고 신문사에 사정전화를 한것도 그같은 심정에서였을 것이다.
사건은 한편의 서부영화 같았다. 그러나 결코 영화가 아니고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엄연한 현실이었다. 완벽한 지역방범은 커넝 지역치안의 거점이 오히려 도둑들에게 습격을 당한 사태는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따지고 보면 이같은 사태는 예견될 수도 있었다. 면목1동 파출소의 경우 소장을 포함, 9명의 경찰관이 6천3백여가구 2만7천2백여명의 주민을 맡아 치안을 유지해왔다. 경찰관 1명이 맡은 주민수는 자그마치 3천8백90명. 근무는 격일제로 하루 4명이 2병은 파츨소안에서, 2명은 관내지역을 순찰하도록 돼있었다. 그나마 수시로 시위진압과 각종 경비둥으로 인력이 차출 당하기 일쑤여서 격일제 근무조차 이뤄지지 않는게 요즘 서울시내 파출소의 한결같은 실정이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장정 2∼3명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습격을 감행할 수 있도록 돼있다는 것이다.
장비는 어떤가. 파출소 직원들에게는 오토바이가 고작이었으나 법인들은 10대들인데도 승용차를 몰며 관내를 유유히 누비고 다넜다.
범법자들은 날로 난폭해지고, 날로 스피드화하는데 경찰의 인력과 장비는 항상 제자리걸음을 하고있는 것이다. 사태가 예견될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제가 감히 어디라고 경찰관서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커다란 오산이다. 엄포와 위압감만으로 치안을 유지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간것이다.
범죄의 패턴이 바뀌면 이에 대응하는 방범의 패턴도 실질적으로 바뀌어야한다. 상응하는 인력보강이 있어야 하고, 상응하는 훈련이 뒤따라야하며, 상응하는 장비가 보급되는등 모든 면에서 뒷받침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 분명한 것은 하나, 소는 잃었지만 뒤늦게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는 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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