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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노무현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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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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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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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먼 바다는 태평양이다. 그곳 해군기지는 파도 너머를 응시한다. 위치는 서귀포 강정(江汀). 그곳에 노무현의 야망이 서려 있다. 노무현 시대에 짓기로 결의한 기지다. 지난 2월 완공(제주 민군복합항)됐다.

이어도 전설이 숨 쉰다. 이어도엔 우리 해양과학기지가 있다. 중국은 그곳을 분쟁지역으로 만들려 한다. 이어도 상공은 중국 방공식별구역에 들어 있다. 한·중 간 배타적 경제수역(EEZ) 갈등도 있다. 부산기지에서 이어도까지 13시간(20노트 기준). 강정에서 바닷길은 4시간이다. 단축 효과는 영유권 분쟁 관리에 결정적이다.

부두에 이지스 구축함 서애 류성룡(7600t)이 떠 있다. 잠수함 박위함(1200t)도 정박했다. 이달 초 그곳에 갔을 때 상황이다. 그곳은 군항과 민항 공용이다. 같은 부두에 군함과 크루즈선이 정박한다. 그 복합성은 독특한 실험이다. 그것은 기지 반대시위의 곡절과 고민을 반영한다.

기지 규모는 적절하다(부두 2400m). 우리 수준에 맞다. 대양 해군 규모는 아니다. 그 대신 지정학적 가치는 탁월하다. 그곳 바닷길은 동중국해로 이어진다. 그 멀리서 강대국 함대들이 파도를 가른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러시아 군함, 칭다오(靑島)가 모항인 중국 북해함대, 규슈 사세보 항의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 미국 태평양 함대 군함들. 제주기지는 전략적 길목이다. 그 함정들을 주시할 수 있다. 남방 해상교통로는 우리 생명선이다. 동중국해에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가 있다. 중· 일의 영유권 다툼은 거침없다.

거센 바람 속에 파도가 출렁인다. 노무현의 유산이 새롭게 다가온다. 국민대 교수 김병준은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다. “노 대통령은 많은 고뇌를 했다. 조선 말기 청일전쟁 때 한반도는 양국의 싸움터가 됐다. 러일전쟁 때 우리 바다는 격전지다. 그 역사는 힘없는 나라의 굴욕과 설움이다. 제주기지 건설은 비참한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다. 자주안보의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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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의 족적은 복선이다. 그는 북한 김정일과 정상회담(2007년 10월)을 했다. 그 대화록은 불쾌하고 어처구니없다. 다수 국민은 찡그렸다. 제주기지 건설은 달랐다. 그곳은 요충지다. 거기서 동해, 서해로 출동한다. 북한 도발을 신속히 응징한다. 일본의 독도 야욕은 집요하다. 제주기지는 그것을 견제한다. 노무현의 집권기록은 다층적이다. 하나의 틀로 규정되지 않는다.

노무현의 성취는 역설과 반전으로 이뤄졌다. 그 시절 미국 부시 정부와의 마찰은 심각했다. 하지만 한·미 FTA 협정을 만들었다. 평화의 섬, 제주도. 2005년 노무현 정부가 설정한 개념이다. 노무현은 그 요건을 다듬었다. 그는 무장과 평화의 공존론을 제시했다. “중립국 스위스의 평화는 무장 없이 지켜지지 않는다. 무장은 국가의 필수 요소다. 무장 없이 평화가 유지되지 않는다.”(2007년 6월) 스위스 중립의 기반은 자주안보다. 이웃 나라의 아량과 자선에 기대지 않는다. 서애(西厓)의 징비록은 예방적 무장 평화론이다. 서애 류성룡함은 해군 엘리트 집결소다. 함장 김성환 대령은 “서애의 안보애국 정신을 바다에 투사하고 있다”고 했다.

제주기지의 롤 모델은 하와이 진주만이다. 군항이면서 관광 미항이다.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도 비슷하다. 그 섬은 골프장과 리조트로 차 있다. 섬의 남쪽 위린(楡林)항에 남해함대 기지가 있다. 그 기지는 남중국해를 바라본다. 그곳의 제해권 다툼은 거칠다. 미국과 중국의 대치는 위험수위다. 중국 여론은 그 섬의 양면성을 밀어준다. 제주기지 여건은 척박하다. 기지 밖은 여전히 시끄럽다. 요즘은 구상권 문제(34억원)다. 기지 공사가 1년여 늦어졌다. 반대 시위 때문이다. 정부는 건설사에 배상금을 물게 됐다. 그 돈은 국민혈세다. 그곳 거리에서 최근 해병대원들이 수모를 당했다. 해병대 붉은색 명찰도 주눅 든다.

노무현의 유산은 상처투성이다. 그것은 추종자들의 변절과 무지 탓이다. 친노 핵심들은 해군기지 업적을 뭉갰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행적도 그 속에 있다. 그는 지난번 대선 때 “제주기지는 참여정부에서 결정했지만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다. 송구스런 심정”이라고 했다. 그 시절 문재인의 지정학적 상상력은 좁았다. 제주기지는 노무현 유산의 매력이다. 세월이 갈수록 장쾌하게 펼쳐진다. 한반도의 전략적 유동성은 커졌다. 바다의 질서는 요동친다. 제주기지는 불확실성에 대비한다.

노무현 서거 7주기(5월 23일)다. 친노 지지자들은 그의 성취를 기리고 있다. 하지만 제주기지는 거기서 빠져 있다. 그 생략은 치명적이다. 노무현 유산의 역사성은 왜소해진다. 문재인은 대선에 다시 나서려 한다. 재도전의 조건은 안목의 변화다. 문재인은 제주기지의 성취를 인정해야 한다. 매력의 발산에 앞장서야 한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