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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130조원 퍼부은 국책연구 … 돈 번 사례는 거의 없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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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14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KIST에서 열린 제49회 과학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김문상(59) 박사는 2014년 6월 6일 저녁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TV에서 일본 통신회사 소프트뱅크의 감성로봇 ‘페퍼’ 출시 뉴스를 본 것이다. TV 화면 속 페퍼는 키 1m20㎝에 팔과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사람의 질문에 귀여운 일본말로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하지만 김 박사가 놀란 것은 페퍼의 성능이 아니었다. ‘내년 2월부터 페퍼를 200만원에 판매해 마치 가전제품처럼 일반 가정에 널리 보급될 것’과 ‘통신회사가 프랑스의 로봇회사를 인수해 페퍼를 만들었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 게임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날 이후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김 박사는 ‘휴보의 아버지’로 불리는 KAIST 오준호(62) 교수와 더불어 한국 로봇연구 분야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석학(碩學)이다. 1987년 독일 베를린공대에서 로봇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곧바로 귀국해 KIST에 합류, 지난 30년간 한국의 로봇 연구를 이끌어왔다. 그는 2003년부터 2013년까지 10년 동안 국가 프런티어 기술 개발사업인 ‘인간기능생활지원지능로봇기술개발사업단’을 단장으로서 이끌어왔다. 10년간 정부출연금 849억원을 포함, 총 970억원의 연구개발비가 투입됐다.


김 박사의 사업단에서 만든 영어교육 로봇 잉키는 국내 23개 초등학교 교실에서 시범 운영되고, 노인 도우미 로봇 실벗은 핀란드와 덴마크 등지의 노인지원센터에 판매되는 등의 실적을 올렸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2010년 세계 50대 발명품 중 하나로 선정해 보도하기도 했다. 국내외 특허등록만 180건,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급 저널에 게재된 논문만 335건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로봇 관련 연구 수준도 세계 정상급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최근까지 팔린 사업단의 지능로봇은 수십 대 수준에 그쳤다. 페퍼가 누적 판매대수 7000대를 돌파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인 왓슨을 개발한 미국 IBM과 손잡고 왓슨 페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시장을 만들어 가는 동안 잉키와 실벗의 성장은 사실상 멈췄다.


김 박사는 “기술적 성과라는 측면에서 잉키와 실벗은 페퍼에 오히려 앞서지만 소프트뱅크라는 기업은 페퍼를 통해 글로벌 로봇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근 들어 국책연구 과제가 더 이상 국가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2014년까지 지난 10년 동안 누적 연구개발(R&D) 투자액은 정부 투자(130조원)를 포함해 총 430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국책 연구과제로 제대로 된 투자 성과를 말할 수 있는 사례를 찾기란 어렵다. 이른바 ‘코리안 패러독스’다. 과학입국(科學立國)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1960년대 말 이후 30~40년간 정부 출연연이 국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을 이끌고, 산업화에 앞장서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 페퍼는 자본이 시장 만들어 상업화지능로봇기술개발사업이 삼성이나 현대·LG와 같은 대기업 자본과 손을 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KIST 김문상 박사는 “그간 개발 기술의 상용화를 위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직간접적으로 여러 번 접촉했지만 안 됐다”며 “이 부분에서 심히 아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KIST가 주도한 기술개발의 완성도만으로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퍼의 경우 소프트뱅크라는 대자본이 프랑스의 기술을 인수해 새로운 시장을 주도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대표적 성공 사례인 자동통역 사업도 KIST의 지능로봇사업단과 유사한 사례다. ETRI는 2008년부터 4년간 총 78억원의 정부 연구개발비 지원을 받아 ‘휴대형 한·영 자동통역기술’ 연구를 수행해 한·영 자동통역앱 지니톡을 개발했다. 지난해 5월 시범 서비스를 중단할 때까지 220만 건이 다운로드될 정도로 높은 인식률과 정확도를 갖췄다. 최근에는 중국어·일어는 물론 프랑스·스페인어까지 자동통역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지니톡 시범서비스 발표 당시인 2012년 10월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니톡은 구글의 통역기보다 정확도가 높다. 문화와 기술의 살아 있는 결집물”이라며 극찬했다. 그는 “미래 성장동력이 여기에서 나올 것”이라며 “앞으로 다양한 언어로까지 확장되면 가히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ETRI의 통·번역 기술이 필요할 것 같은 국내 대기업들은 지니톡을 쓰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는 자체 번역기 앱을 개발해 서비스하고 있고, LG전자는 아예 자체 개발 없이 구글 번역기에만 의지하고 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도 지니톡 대신 자체 연구개발을 통해 한·중·일 번역기를 서비스하고 있다. ETRI의 자동 통·번역 기술은 최근 한글과컴퓨터가 자동 통·번역 기업 시스트란과 공동 투자한 자회사 한컴인터프리에 이전돼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국내 대기업은 왜 정부 출연연이 개발한 기술을 외면할까. 회사마다 각기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대기업들의 자체 연구개발 역량이 높아지면서 과거에 비해 출연연의 기술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10년 이상 출연연 관련 업무를 맡아왔다는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어디든 좋은 기술이 있다면 출연연이라고 꺼릴 이유는 전혀 없다”면서도 “국내 출연연은 우리의 눈높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출연연의 연구 문화가 대기업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도 했다. “기업은 글로벌 전쟁터에 나와 있는데 출연연과 같이 일할 때는 여러 가지로 답답함을 느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삼성·현대·LG와 같은 대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필요한 기술을 굳이 국내에서만 찾을 이유도 없다. 다른 대기업 임원은 “이미 외국의 최신 기술을 가진 기업들을 활발히 인수합병(M&A)하는 방식으로 기술력을 키워오고 있다”며 “그룹 내부에서도 연구인력을 통해 기술개발을 한다”고 말했다.


네이버가 ETRI의 번역 기술을 도입하지 않고 자체 개발하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네이버에 너무 중요한 인공지능 기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네이버의 김정우 부장은 “네이버는 ETRI보다 앞서 통·번역 기술을 꾸준히 개발해 왔다”며 “네이버의 여러 서비스에 특화된 통·번역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체 개발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출연연 기술을 독점적으로 인수하기 어려운 점도 걸림돌이다. 기술의 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은 ‘공공연구기관은 기술을 일반인(기업)에게 이용하게 하는 경우에는 통상(通常)의 실시 또는 사용에 관한 권리를 허락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통상’이란 특정 기업이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누구든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물론 예외규정도 있다. ①다른 법령 또는 협약에서 전용(독점)의 실시 또는 사용을 정한 경우 ②통상의 실시 또는 사용에 관한 권리를 받으려는 자가 없는 경우 ③기술의 특성상 불가피하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하지만 기술 독점 인수에 대한 대가가 지나치게 높다거나 기술이전 이후에도 이어지는 연구개발자의 지적재산권 인정(러닝 개런티) 등이 대기업의 출연연 기술 인수를 꺼리는 이유로 작용한다.


출연연 기술 독점 인수 어려운 게 걸림돌최근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가 ‘출연연과 기업·대학의 역할 구분’이다. 출연연 내부 목소리도 다르지 않다. KIST의 15대(1993~96) 원장을 지낸 김은영(79) 박사는 “대학은 기초연구, 기업은 돈 버는 연구, 출연기관은 돈은 못 벌어도 10~20년 후 대두될 미래·공공기술 등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지금 한국은 프로젝트 하나를 두고 기업체와 출연연·대학이 경쟁을 벌이는 풍토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강홍렬 박사는 최근 출연연에서 하고 있는 연구의 상당 부분이 민간 기업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민간의 역량과 자원이 부족했던 60~70년대에는 국가가 주도해 연구개발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 주효했지만 이제 환경이 많이 바뀌었는데도 개발연대 국가정책시스템의 운영방식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의 전호일 경영기획실장은 연구기관 간 역할 중복의 원인으로 ▶80년대 이후 국내 대학과 기업이 역량이 빠르게 증가한 데다 ▶96년부터 도입된 연구과제중심(PBS·Project Based System) 제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PBS는 연구 주체 간, 연구팀 간 경쟁을 촉진하고 연구기관의 회계와 인력관리를 투명하게 하기 위해 도입됐다.


전 실장은 “목적과 달리 PBS는 연구자가 연구 경쟁이 아닌 인건비 확보를 위한 과제 수주 경쟁에 몰입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며 “대학과 출연연·기업이 과제 수주를 위한 맞경쟁을 하게 되면서 연구 주체 간 기능과 역할도 모호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정부부처 간 또는 부처 내부의 조정이 이뤄지지 않고, 기관장의 기관 성장 욕심과 지자체나 지역 국회의원의 불합리한 요구도 연구기관 간 역할 중복의 배경이 됐다고 지적한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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