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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짜리 자서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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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9면

1969년 3월, 도쿄를 비롯한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 이례적으로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도쿄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스물 여덟 청년 김영작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임신 9개월째이던 아내에게는 “연구와 아르바이트를 겸해 한 달 정도 일본 각지를 다녀오겠다”고 둘러댔다(그날 이후 부인은 남편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지 않게 됐다고 한다). 살아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죽어도 시체조차 못 돌아올 가능성이 다분한 여정이었다. 눈밭을 헤치고 정류소까지 갔으나 버스는 올 줄을 몰랐다. 가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인가보다 하며 발길을 돌리려던 즈음 저 멀리 눈보라 속에 버스가 실루엣을 드러냈다. 시내로 이동해 미리 약속한 찻집으로 향했다. 한산한 실내. 한 테이블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내가 눈에 띄었다. 탁자 위에 성냥갑 두 개가 포개져 놓여 있었다. 접선할 사람이라는 신호였다.


그로부터 사흘 후 김영작은 청진항에 도착했다. 북한 공작선을 타고 밀입북한 것이다. 북한 124군부대 소속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1·21사태가 바로 전 해의 일이었다. 서슬 퍼런 남북대결의 시대에 밀입북한 데 대해 김영작은 “북한사회를 직접 관찰하고 북한 지도자들의 통일에 관한 생각과 정책을 알아보려는 ‘천진스러운 생각’도 작용했다”고 회고한다. 43일의 방북기간 중 대부분을 당시 북한 대남담당 비서이던 김중린(1923~2010년)이 동행했고, 김중린으로부터 김영작을 소개받은 김일성은 “남조선 혁명을 위해 수고가 많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정작 김영작은 북한 엘리트들을 두루 만나고 나서 유일사상의 논리적 모순과 체제의 문제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일단은 무사히 일본으로 귀환해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된 김영작은 1972년 한국에 잠시 귀국했다가 ‘간첩죄’로 체포된다. 무기징역 구형에 10년형을 선고받고 5년 간 복역하다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필자가 김영작(75·국민대 명예교수) 박사를 처음 만난 건 20년 전 도쿄특파원 시절이었다. 몇 분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그의 밀입북 회고담을 들으며 대단히 흥미를 느낀 기억이 생생하다. 몰래 북한 지역에 들어간 사람으로 김영작 이전의 박진목·김낙중이나 이후의 황석영·임수경·김영환 등이 거론되지만 주된 동기가 학문적 호기심이었던 이는 아마 김영작뿐일 것이다. 그의 도쿄대 은사가 “김 군은 현대가 아닌 메이지(明治) 시대에 태어났어야 했어”라고 평했던 대로, 기(氣)가 매우 세고 호방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김 박사의 인생역정은 방북과 투옥·석방에서 끝나지 않는다. 1980년 귀국 후 전두환 정권에 참여(민정당 이념실장)하는 또 한차례의 반전을 일으킨 것이다. 그후 다들 선망하는 국회의원직을 딱 1년 하고 헌신짝처럼 내던진 뒤 학계로 복귀해 학문적으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김영작의 사주를 본 용하다는 점술가가 “당신은 네 기둥(四柱) 모두가 시퍼런 칼날에 둘러싸여 벌써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어떻게 살아 있느냐”며 깜짝 놀랐다는 실화가 있다.


문제적 인물을 만났을 때 기자의 본능은 인터뷰를 하는 것이고 출판인의 본능은 자서전·평전을 펴내고 싶은 것이다. 김영작 박사도 그런 인물에 속하지만 회고록 출간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김 박사를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책자 하나를 선물받았다.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작년에 펴낸 『일본연구』라는 간행물에 실린 특별기고 ‘해방 후 1세대 일본 유학생의 회고’였다. “특별한 경험들을 기록으로 남기라”는 지인들의 권유로 쓴 소전(小傳)이라 했다. 워낙 발행부수가 적은 탓에 주변의 성화로 김 박사의 특별기고만 따로 떼내 100여 부를 더 찍었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를 얘기할 때 흔히 ‘격동(激動)’이라는 수식어를 앞세운다. 웬만한 나이라면 누구나 ‘내 인생은 소설책 한 권’이라 자부한다. 그냥 소설이 아니고 대하소설이라야 어울릴 인물도 꽤 있다. 그에 비해 자서전이나 전기·평전 문화가 서구에 비해 턱없이 빈약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당사자부터 미화와 분식(粉飾)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다, TV드라마·책에 나온 아득히 먼 조상에 관한 묘사까지 문제삼아 법적 분쟁으로 몰고 가는 풍토에서 지기추상(持己秋霜)의 정직함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중에 백범 김구에 관한 책이 50종 가까이 출판된 것을 두고 출판평론가 표정훈 씨는 “백범만큼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라고 날카롭게 꼬집기도 했다. 그러니 뺄 것 빼고 부풀릴 것 부풀려 맹탕뿐인 ‘소(小) 위인전’들이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수두룩하게 나와 있을 것이다. 결국 사회 전반의 지적 정직성과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 문제라고 본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숱한 굴곡을 겪은 노학자의 불과 26쪽짜리 회고록을 귀하게 읽으며 든 생각이다.


노재현중앙일보플러스?단행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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