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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덕구의 NEAR 와치

승자의 저주와 큰 바위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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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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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온갖 것을 다 보여주며 20대 총선이 휩쓸고 지나간 대지에는 봄꽃바람의 향긋한 내음뿐 아니라 승자의 파티와 환호 소리가 들린다. 패자의 탄식과 후회 속에 맛보는 쓰디쓴 쓸개즙 냄새도 진동하고 있다.

승리한 야당, 구태 벗고 승자의 저주 넘어 국정 협치에 동참해야
국운의 분수령에서 슈뢰더 전 총리 같은 큰 바위 얼굴 찾아 세우자

문득 20년 전 외환위기 당시 상황이 오버랩됐다. 1996년 총선에서 김영삼 대통령 휘하의 여당이 압승했다. 승리에 도취된 여당은 경제 상황이 악화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승자의 저주에 빠져 국란을 자초했다. 위기의 태풍이 다가오는데도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적 이유로 대기업 부도와 구조조정에 부정적이었고, 유력한 대권 후보인 야당의 김대중 총재는 대중경제론을 주창하며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대권 후보들의 유세장에 동행한 국회의원들은 국회로 돌아오지 않았고 금융개혁법은 좌절됐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으나 그는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국가 부도 위기라는 급보를 받았다. 그는 생각과 노선을 상황에 맞게 바꾸고 철저히 지켰으며 위기는 조기에 수습됐다. 후일 그는 몇몇 각료에게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웠던 당시의 심경을 토로하곤 했다. 승리는 항상 승자의 저주 위험을 품고, 패배는 또 다른 기회를 품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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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실로 역사는 반복하는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전환기의 분수령에서 국가 지도자들이 아집과 상황 오판에 빠지면 국가의 미래가 나락에 빠질 수도 있다. 이번에 승리한 야당들도 국가 위기 관리 과정에서 국정을 잘못 리드하고 도처에 묻혀 있는 지뢰를 밟는다면 승자의 저주에 빠질 것이다. 당장 그들 앞에는 몇 개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놓여 있다. 기업 구조조정 문제 등 당면 현안에 대한 새로운 자세와 선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큰일을 해보겠다는 정치 리더들이 개인·정파의 이익과 국가 공동체의 이익이 충돌할 때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선택하는 큰 바위 얼굴인지 아니면 대중영합적인 협량의 조약돌인지를 국민들이 냉정한 눈으로 평가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잔여 임기 20개월은 비장하리만큼 중요하다. 지금 빠르게 심화되고 있는 정체기의 경로를 차단하고 국가 구조조정에 매진해 추격기로 되돌아갈 수 있는 절박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은 생각과 자세를 바꿔야 한다. 먼저 지난 3년여의 국정 운영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통해 현 상황을 실사구시적·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소통을 통해 국정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임금님처럼 역사에 남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인사가 만사라는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이 20개월은 박 대통령이 마음먹기에 따라 국정을 크게 혁신시킬 수 있는 시간이지만 자칫 판단을 잘못하면 나라를 위기의 심연에 빠뜨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박 대통령은 위기로 향하는 경로를 차단하지 못한 김영삼 정부가 역사의 죄인처럼 남게 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90년대 버블 붕괴 시 일본 경제의 미래를 잘못 예측하고 흐름을 반전시키지 못함으로써 이후 20년 이상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지게 한 당시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박근혜 대통령은 독일 통일 이후의 혼란과 정체를 수습하고 독일을 세계 경제의 강자로 재부상시킨 슈뢰더 전 총리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그는 날카로운 역사의식과 담대함을 갖춘 인물이다. 슈뢰더는 국가 구조조정을 위한 ‘어젠다 2010’을 제창하고 ‘하르츠 위원회’를 통해 국론을 결집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그 성공한 정책 때문에 다음 총선에서 패배했다. 바로 이런 자기 희생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 국민들도 그다음 60개월 동안 한국의 운명을 헤쳐 갈 대통령을 새로운 각오로 잘 뽑아야 한다. 금세기 들어 그저 밋밋하고 평범한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됐다. ‘누구누구도 했는데 나라고 못하랴’ 하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전환기가 오는지, 무엇이 국정의 우선순위인지 잘 모르며 정치공학에만 능한 인물이 아무 준비나 안목 없이 패거리의 크기에 따라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설익은 정치·정책 실험을 남발했으며 뿌리가 썩고 있는데 나뭇잎에만 물을 주다 임기를 마치곤 했다. 그사이 우리 경제는 모처럼 맞이한 추월기를 짧게 마감하고 정체기로 진입하게 됐다.

그러나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의 역설대로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은 과거와 매우 다르다. 심각한 정체기의 분수령에서 추락기로 연결되지 않도록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는 절박한 시기에 있다. 이를 뛰어넘을 결기와 지혜와 담대함을 지닌 큰 바위 얼굴을 찾아 대통령으로 세우는 것이 이 시대 국민 모두가 성취해내야 할 중요한 역사적 과업인 것이다.

어떤 인물이 큰 바위 얼굴일까.

1. 큰 안목을 가지고 전문성과 상식을 중시하며 현실감·균형 감각을 갖춘 인물 2. 지역주의·특정 정파에 볼모로 잡히지 않고 전 국민이 서로를 용납하고 화합하도록 이끌 포용적 인물 3. 이 시대의 과제인 통일 기반 조성, 정체기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국가 구조조정을 주도하며 이를 국민 모두에게 설득할 수 있는 인물 4. 국가 공동체의 이익과 정파·개인의 이익이 충돌할 때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선택하며 희생할 수 있는 인물 5. 국가의 미래를 개척할 쇄빙선의 역할을 하며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큰 바위 얼굴이다.

앞으로 대권을 꿈꾸는 인물들이 이러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깊이 성찰하기 바란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