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흑자 줄여라" 보이지 않는 압박…한국 수출 또다른 암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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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한국에 “대미 흑자를 줄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환율정책과 관련 한국을 ‘관찰대상국(monitoring list)’으로 지정하면서다.

대미 무역 흑자 5개국에 경고
한국에는 원화 절상 요구
정부 환율관리 시험대에 올라

미 재무부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주요 교역국의 환율정책 보고서’를 통해 한국과 중국, 일본, 독일, 대만 등 5개국을 환율 조작 여부 관찰대상국으로 분류했다.

올 2월 발효된 교역촉진법이 근거가 됐다. 기준은 세 가지다. ▶현저한 대미 무역흑자(연간 200억 달러 이상)▶상당 규모의 경상흑자(GDP 3% 초과)▶한 방향의 지속적인 외환시장 개입(GDP 대비 2% 초과 순매수, 12개월 중 8개월 이상 순매수)이다. 세 가지 모두 해당하면 환율조작국에 해당하는 ‘심층분석대상국’으로 간주된다. 두 가지만 충족하면 관찰대상국이 된다.

심층분석대상이 되면 미국 조달시장 참여가 배제되는 등 보복 조치가 뒤따른다. 미 재무부가 이번에 환율조작국으로 지목한 나라는 없었다. 관찰대상국엔 특별한 제재가 없다. 정부에선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일호 경제 부총리는 지난달 30일 기자들과 만나 "한국이 ‘심층분석대상국’에서 빠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환율정책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관찰대상국이 된 사정을 따져보면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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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대규모 무역흑자와 경상흑자 2가지가 해당됐다. 2015년 대미 무역흑자는 258억 달러, GDP 대비 경상흑자 비율은 7.7%다. 흔히 환율전쟁과 무역보복의 실마리가 되는 것은 외환시장 개입이다. 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지원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문젯거리가 된다. 미국은 지금까지 한국의 원화가치 약세를 위한 시장개입(달러매수)을 문제삼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한국은 정반대로 움직인 경우가 많았다. 미국도 그걸 안다. 미 재무부는 보고서에서 한국정부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3월까지 260억 달러(약 30조원) 매도개입을 했다고 추정했다. 원화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시장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 독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가 걸렸다. 중국도 위안화 약세를 노린 시장개입이 도마에 오른 것이 아니다. 중국은 외려 위안화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4800억 달러를 내다 판 것으로 추정됐다. 일본에 대해선 지난 4년 이상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네 나라의 공통점은 미국과의 교역에서 대규모 흑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일정 규모 이상의 대미 무역흑자를 용인하기 어렵다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결국 대미 흑자를 줄이라는 얘기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국이 무역 불균형 확대를 우려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고 평했다.

미 재무부는 “관찰대상국의 경제 흐름과 외환정책을 면밀히 관찰하고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엔 보다 노골적이다. 보고서는 “중기적으로 원화 절상이 수출 편중형 경제 구조를 바꾸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외환시장 개입은 시장 상황이 무질서해지는 경우로 제한하라”고 밝혔다. 원화가치를 더 올리라는 주문이다. “내수활성화를 위한 추가 조치를 취하라”고도 했다.

미 재무부의 이번 발표는 자유무역에 대한 미국 내 반감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의 극단적인 보호무역마저도 상당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입장은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를 끌어 올리는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가뜩이나 식어가는 수출에 악재가 아닐 수 없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환율정책에 직접적인 피해가 생긴다고 보긴 어렵지만 원화가 강세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정부의 ‘환율관리’가 시험대에 올랐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세종=조현숙 기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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