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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여론조사에 나라의 정치 운명 맡겨선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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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은 여론조사의, 여론조사에 의한, 여론조사를 위한 총선이었다. 총선 후보자 선정과 현역 의원 물갈이 판단이 여론조사로 이뤄졌다. 어느 선거보다 절대량도 많아 중앙선관위에 등록된 총선 여론조사는 2000개를 훌쩍 넘는다.

특히 이번 총선에선 안심 번호가 처음 도입됐다. 정당이 당내 경선용 여론조사를 실시할 경우 선관위를 통해 이동전화 안심번호를 제공받는 것이다. 이동통신사가 11자리 임시번호를 만들어 휴대전화 이용자의 성별·연령·거주지 정보를 선관위에 제공하면 각 당이 이를 받아 활용했다. 새누리당은 이런 여론조사를 적게는 70%, 많게는 100%까지 적용해 지역구 후보를 결정했다. 또 전략 공천의 근거로 활용했다.

여론조사가 공직 후보자를 결정하는 주요 잣대라면 조사의 공정성과 투명성, 신뢰성에 이의가 생겨선 안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의가 차고 넘쳤다는 점이다.

◇불법 여론조사, 19대 총선에 비해 3배 넘게 늘어
우선 불법 여론조사가 크게 늘었다. 선관위는 이번 총선 여론조사 중 96건을 검찰에 고발했다. 4년 전에 비해 3.3배 늘어난 수치다. 급증한 이유는 총선 후보자 선정을 위한 여론조사 경선에서 조사 결과를 조작한 경우가 많아서다. 의뢰자의 의도에 맞게 여론조사를 해주거나 돈을 받고 의뢰자가 원하는 수치를 줬다가 적발된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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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여부를 떠나 신뢰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한 여론조사 조작 정황과 주장도 전국 각 선거구에서 잇달아 제기된다.

가장 흔한 일반적인 불만은 여야당 당원들이 선거 현장에서 과대 대표된 샘플로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경선 여론조사로 당원들이 훈련된 결과 특정 후보 당선을 위해 전략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60대 이상 샘플은 확보가 쉽지만 20~30대 샘플은 어렵다는 점에 착안해 60대 당원이 ARS(자동응답시스템)엔 20대, 70대 당원은 30대로 응답해 이기는 조사를 만들어냈다는 기막힌 증언도 있다. 말만 안심 번호지 뒤틀리고 오염된 여론조사다.

더 근원적으론 당원 명부 자체부터 엉터리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유령 당원' 얘기는 정치권에 이미 파다했다. 대구에선 한 예비후보가 통신사 콜 센터를 이용해 친인척 20여 명의 거주지를 자신의 주소로 옮겼다는 의혹에 휘말렸다. 심지어 새누리당이 실시한 당내 경선관련 여론조사마저 왜곡·조작 의심을 받아 선관위가 용의자 8명을 검찰에 수사 의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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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가 실제 선거 결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런 오류투성이에 오염까지 확인된 여론조사가 공직 후보자를 가르는 기준이었다니 누가 승복할 수 있겠는가. 선거 공정성, 건전한 여론 형성을 왜곡, 의심하게 하는 반민주적인 일이다. 불법 시비와 불법 소송 등 극심한 후유증도 예상된다. 그럼에도 2002년 야권에서 노무현·정몽준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여론조사로 만든 이후 지금까지 각 정당은 여론조사로 후보를 공천하고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어이없는 일이다.

심지어 안심 번호 아닌 나머지 조사 기관의 여론조사는 아예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지경이었다.

◇결과 예측 못한 '헛점 투성이' 여론조사
총선 전 대부분 여론조사는 새누리당의 과반 확보와 더불어민주당 참패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표본과 응답률도 천차만별이었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실시한 조사에서 지지율 격차가 25%p에 달한 경우가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큰 차이로 순위가 바뀌는 건 거의 매일 반복됐다.

여론조사 기관의 한계도 드러났다. 대형 회사들조차 지역 유권자의 무선 전화를 잡아내지 못한 것이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돼 있는데도 유선전화에만 의존했으니 여론조사가 맞는 게 기적이다. 그런데도 100개 넘게 난립한 조사 회사들이 응답률 2%가 되지 않는 자동응답기 조사를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그러니 여론조사를 '못 믿겠다'(47.7%)는 응답이 '믿는다'(43.3%·리얼미터 조사)는 의견보다도 많다.

이런 엉터리 여론조사가 총선 후보자 평가와 선정에 최종 의사결정 수단으로 작용하고, 선거 과정에선 민심을 출렁이게 해 선거 결과에 악영향을 끼쳤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언제까지나 나라의 정치 운명을 여론조사에 맡길 순 없다.

당장은 선거 여론조사와 관련된 제도를 바꿔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업체에만 조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도록 하거나 문항 내용, 표본 채취를 공개하는 방안이 검토해야 한다. 또 무선전화 안심번호 제도를 정밀하게 손질해 자격을 갖춘 여론조사 회사들에게 제공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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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본적으론 여야 정당들이 장기적 안목에서 공천제를 손질하는 제도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아무리 안심번호란 안전판을 도입해도 여론조사는 공직 후보를 결정하는 데 부분적 지표로 활용하는 게 맞다. 공직 후보 경쟁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론조사 공천이 되려면 역선택을 비롯한 부작용을 해결할 완전한 보완책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야 각 당은 당원들의 직접·비밀 투표를 중심으로 하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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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공천은 정당 실세가 독점해온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의미가 있다는 반론이 있다. 과거 여야당에선 전략 공천이란 이름의 물갈이를 내세워 제왕적 총재로 불린 공천권자가 줄서기를 강요했다. 당 대표가 아니면 계파 수장끼리 공천권을 나눠 행사한 게 한국의 후진적 정치 행태였다.

물론 그런 폐해를 피해간 장점이 있다. 하지만 본질적 결함은 더 크다. 우선 당 정체성과 상관없이 유권자의 호감도가 유일한 공천 기준이면 정당 역할은 뭐냐는 의문이다. 여론조사엔 당과 무관한 일반 유권자의 뜻이 반영될 뿐이어서 정당의 책임성이 약화된다. 게다가 공천권은 정당이 갖고 정당 공천을 심판하는 게 선거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건 사실상 2중 선거를 치르자는 말과 같게 된다.

또 각종 선거에선 투표율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게 추세다. 투표하지 않는 유권자가 공천 과정에서 여론조사에 적극적으로 답하길 기대하는 건 어렵다. 결국 여론조사를 포함한 상향식 공천은 조직이 강한 후보가 유리하고 역선택으로 결과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여론조사는 추세를 나타내는 지표다. 오차범위 내에서 후보자의 당락이 갈릴 경우 당선된 후보자와 탈락한 후보자 사이에 승복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국민참여 경선, 상향식 공천 등의 그럴듯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경선은 원론적·현실적·기술적 다중 결함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오픈 프라이머리를 실시하는 미국도 순수 오픈 프라이머리는 11개 주에서만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