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길을가다(12)-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 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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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시마도(우창)를 떠난 통신사 일행의 다음 기항지는 무로쓰 (실진) 다. 방안 (실) 처럼 바람이 막히고 아늑한 항구라는 뜻에서 실진이란 이름이 붙었다고하리마 (파마) 풍토기는 쓰고있다.
지금은 웬만큼 큰 지도를 펼쳐도 이름조차 찾기 어렵다.
오까야마 (강산) 에서 탄 신간선 다마고호는 불과 16분만에 취재팀을 아이오이 (상생) 역에 내려 주었다. 아이오이는 인구4만6천명의 작은 지방도시다.
이처럼 작은 도시에 신간선이 정차하는 이유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조선소IHI (우천도파마) 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로쓰까지는 자동차로 20분 거리.
우시마도에서 야반이 지나도록 일본의 문인들과 교유한 신유한공 일행은 9월2일 아침 느직이 배를 띄워 하오 4시에는 무로쓰항에 닻을 내린다. (『해유록』)거리가 멀지 않은데다 적당한 바람이 불어 항해가 순조로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늘의 발달된 교통수단은 그 거리를 더욱 단축시켜놓고있다.
우시마도에서 오까야마역까지의 버스길 1시간을 포함해 무로쓰까지 가는데 1시간40분이 채 안 걸린다.2백6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아이오이역에서 탄 택시가 고층건물이 별로 없어 납작한 인상을 주는 시가지를 벗어나자 바로 길 오른편으로 강줄기처럼 좁고 긴 아이오이만의 검푸른 바다가 나타난다.

<방처럼 아늑한 항구 실진으로 이름 붙여>
양쪽 해안을 따라 거대한 크레인과 대형 선박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어 가까이 보이는 선체가 위압감을 준다.
IHI의 아이오이 조선소다. 아이오이만을 벗어나 오른쪽에 바다를 낀 채 다시 국도 250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10여분을 달리자 작은 만이 앞을 막으면서 그 너머로 낮은 산줄기를 의지해 삼태기처럼 깊숙이 들어앉은 포구가 보인다.
한때「실진간헌」이라 불리며 번영을 구가했다는 무로쓰다. 매림이 유영하다더니 검은 지붕들 너머로 멀리 보이는 횐 꽃무더기들이 화사하다.
신유한공은 무로쓰에 도착했을 때의 인상을 『해유록』 에 이렇게 남기고 있다.
『사관의 건물은 창려하며 앞만의 물은 널찍하고 산은 높은데 구름과 놀이 걸려있다. 사방으로 기이한 경치를 바라보니 객회가 매우 상쾌해진다.』
물이 넓고 산이 높다는 것은 시각의 차이일 듯 싶다. 에도(강호)시대 무로쓰는 조선통신사의 기항지였을 뿐 아니라 서부 일본의 봉건영주(다이묘·대명) 들이 장군이 있는 에도를 오르내릴 때 배를 대던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일본봉건영주들은 일정기간씩 강호와 자기 영지에서 번갈아 살며 근무했는데 이를 삼권교대(산낀고오따이)라 불렀다.
지금은 다닥다닥 붙은 낡은 집들과 포구에 매여있는 작은 어선들이 초라하고 한적하게 보여 역사의 뒷길로 밀려난 무로쓰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다.
거리에 들어서니 자동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좁은 골목을 따라 연격자라 부르는 창살문의 구옥들이 줄지어 남아 있다. 지나가는 마을 여자에게 물으니 옛날의 유곽이란다.
무로쓰 주민들은 이 고장이 유곽의 발생지라고 주장한다.
통신사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향토사에 밝다는 우편국장 「사또오」 씨 (좌등정민·62) 를 집으로 찾아갔다.
「사또오」씨는 통신사들이 상륙한 부두가 지금 어업협동조합 주유소가 있는 곳이라고 가르쳐준다.
통신사일행의 숙소였던 히메지(희노) 번의 별장터를 물으니 지금 무로쓰정민센터가 들어서 있는 자리란다. 전에 어업조합사무실이 있던 것을 헐고 2년전 새로 지었다고 했다.
부두에 가까운 중심가에 있는정민센터는 흰색의 3층양옥으로 옛날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건물 앞에「실진의 역사」란 큼직한 안내판이 서있고 그내용중에 이곳이 히메지번의 별장터였으며 여기서 조선통신사에향응을 베풀었다는 구절이 있다.

<안내판·향토지에도 향응베푼 구절생생>
통신사를 접대한 영빈관이 히메지번의 별장이었다는 사실은 무로쓰향토지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그 위치가 어디라는 것은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관심을 가지고 조사한 결과 그 위치를 확인하게 됐다는 것이다.
안내판의 통신사에 관한 부분을 옮겨보면『이 무로쓰정민센터는 희노번주 지전휘정이 건설한 번 운영의 다옥 (별장) 이 있던 곳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이 나루는 원래 서국의 해로에서 상사 (상사) 혹은 대소 봉건영주, 그밖에 외국의 사신 등이 배를 대던 곳으로 이 관사에서 향응이 있었다. 이 같은 연유로 특히 조선인 내조의 경우에는 이곳에서 향응이 베풀어 졌다」고 쓰여있다』고 적혀있다.
수년전 이진희 교수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확인되지 않았던 통신사일행의 숙소인 영빈관 터가 현지 인사들의 노력으로 발견되어 누구나 볼 수 있는 안내판에 뚜렷이 소개돼 있다는 것은 선린우호에 가교 역할을한 통신사내방의 의의를 새로 인식하게 됐다는 실증으로 보여 반가왔다.
그들의 인식을 일깨운 것은 이 교수를 비롯,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과거의 사실을 캐내려고 애쓴 이들의 노력이 자극제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추적하는 소설가 김달수씨, 광개토대왕비 및 조선통신사연구에 헌신해온 이진희 교수, 중·근세 한일관계사 연구의 권위인 강재층교수나 강동광교수, 청구문화사의 신기수대표, 한국문화연구원의 최서면원장등 재일학자들의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 번영했던 곳이 대개 그렇듯 무로쓰에도 절이 많다. 총 4백80가구에 인구 1천8백50명의 작은 어촌에 절이 5개나 된다.
통신사 일행의 숙소로는 히메지번의 별장인 영빈관 이외에 자꾸쇼오 (적정) 사· 조오운 (정혼)사·도꾸조오 (덕승)사등이 상관·중관·하관 등의 숙소로 이용됐다고 「사또오」 우편국장은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절의 건물은 대부분 신·개축된 것들이어서 옛날의 모습은 알 길이 없다.
정민센터로 바뀐 영빈관 터도 지금의 면적은 1백평 정도이나 옛날의 규모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시문창수 힘들까봐 미리 부탁 지도 받아>
무로쓰에서도 통신사일행은 정성어린 환대를 받았다. 무로쓰의 통신사 일행에 대한 접대기록으로는 가모 (하무) 신사에 보관돼 있는 『한객과실진록』 이 있다.1655년 통신사 때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히메지」번주는 통신사 일행을 맞기 위해 그 해 6월24일 막부의 통첩이 있기 1년전부터 준비에 착수한다.
영빈관인 별장의 개· 보수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통신사일행의 경비를 위해 포구 남북에2개소, 영빈관 좌우에 2개소등모두 6개의 초소를 설치했다.
이같은 준비 끝에 8월26일 무로쓰에 도착한 통신사일행은 선상에서 쏘아 올리는 총성의 예우를 받으며 주악에 맞추어 영빈관으로 들어간다.
무로쓰는 음료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배 1백여척을 동원하여 다른 곳에서 좋은 물을 실어 나르고 어민들을 동원하여 접대에 쓸 고기를 잡도록 했다.
접대역의 복장에도 신경을 써서 최고로 예의를 갖추도록 했다고 되어있다.
무로쓰의 정성어린 접대에 대해서는 1621년 통신사 때의 부사 강홍중공도 그의 『동계록』에서『지대의 성근한 것과 사후의 공손한 것이 지나온 다른 곳에 비하여 월등하였다』 고 쓰고 있다.
그런데 신유한공은 무슨 까닭인지 무로쓰에서 묵은 하룻밤을 배에서 잤다.
통신사 일행을 기다리던 이곳의 문인들은 글을 써서 쓰시마(대마) 번의 접대역 「아메모리」(우삼방주) 를 통해 신공에게 보아 달라고 보낸다.
『섭진의 문인들이 장서단율들을 우삼에 부탁해서 보내왔다. 아마도 내가 앞으로는 날로 바빠져서 시문의 창수에 응할 여가가 없는 것을 알고 조용할때를얻지 못할까 두려워서 먼저 보낸것일것이니 우습다.』(『해유록』)
일본인들의 우리학문에 대한 갈구와 우리의 의연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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