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옥천 육씨|임진란때 의병, 충의전통 빛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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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옥천육씨의 시조는 육진. 지나절강생소헌부 사람으로 신라 경순왕 원년 (AD927년) 에 당나라의 사절로 신라에와 귀화, 정착했다고 육씨네 족보는 기록해온다.
그때 육보와함께 홍·정·최·유·심·서·하등 이른바「8학사」가 신라에 들어와 한국인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중에도 육보는 경순왕의 남다른 신임을 얻어 마침내는 사위(부마)가 되고 관성군에 봉해졌다고 전한다.
관성은 옥천의 옛이름. 고별 때 옥주로 바뀌었다가 조선조에 옥천이 된 것이다.
후손들이 옥천을 관향으로 쓰게된 연유다.
몇년전까지만해도 옥천군안내면인포리에는 후손들이 세운 관성군 육보의 설단과 비가 있었다.
대청댐의 완공으로 수몰지역이되는 바람에 설단비는 옥천읍으로 옮겨져있다.

<귀화한 당인이 시조|3세때 4파로 갈려>
관성군이후의 중간대를 실전하고 고려 충열왕때의 육인단 (주부공) 을 세계상 1세로 족보를 꾸며왔다. 2세가 희가, 3세는 거원.
3세 거원은 모두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이름을 떨쳐 이들 형제대에서 크게4파로 갈라지게 된다.
전국에 분포된 육씨들은 모두가 이들의 후손인 셈이 된다.
4파는 덕곡공파(육려) 목사공파(육항) 순채사공라 (육곤) 낭장공파(육수). 다섯째인 육태귀는 공양왕때 1품까지 을랐으나 손자대에서 후손이 끊겼다.
이 4파중 후손이 많은것은 덕곡공파와 목사공파다.
덕곡공파를 이룬 육려는 고려사에 이름이 남은 큰 인물. 자는일중, 호를 덕곡이라 했으며 공양왕때 도순찰사를 지냈다.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명성을 날렸던 그는 여말 불교의 폐해가 두드러지자 강력히 척불을 상소하기도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충남공주에 가까운 덕리에 숨어 생애를 마쳤다한다.
전배 장수의 압계사는 육려를 배향한 사당.
덕곡공파는 다시 2계로 나뉘어저 우동계와 우정계를 이룬다.
문무에 고루 인재를 낸 육씨들은 특히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싸운 충의의 전통이 두드러진다.
우동계의 동고 육보 (12세) 가 그 대표적 인물. 맹조때 효행과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병자호란을 맞아 안천용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저은 육병양 (22세) 도 조선조말 최익현등과 함께 죽음을 맹세하고 척왜의병을 일으켰다.
석정계에서는 조선조 명종때 문명이 높았던 경암 육대춘이 있다. 경암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까지 이르렀으며 전주율광사에 제향되고 『경암유고』를 남겼다.
육씨중 가장 후손이 많은 것은 목사공파다.
고 박정희대통렴의 부인 육영수여사도 이 파에 속한다.
목사공(항)은 진(5세)과 상, 두 아들을 두었다.
진의 후손으로는 부위육저(6세) 제주목사 육한 (8대) 동래현감 육세영 (12세)등과 정조때 유학자 은천재 육상지 (20세) 등이 있다.
은천재는 문명이 높아 고향에서 많은 후학을 길렀으며 『은천재유고』가 전해오고 있다.
그가 살았던 옥천군청성면마장리가 은천동으로도 불린것도 그의 명성탓.
고종때 육병규 (21세), 그의 아들 용정과 용필 (진사) 역시 문한으로 이름을 냈다.
육용필은 종윤·종운·종면·종욱·종관의 5형제를 두었는데 막내 종관이 바로 육영수여사와 전국회의원이며 현재 종친회장인 육인수씨의 아버지다.
상의 후손으로는 명조때 훈련원 판관을 지낸 육성우(11세)가 있다.

<금산싸움때 전사|칠백의총에 묻혀>
육성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로 호종하여 공신녹권을 받았다.
육정환은 조헌등과 함께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커 금산싸움에서 전사, 7백의총에 묻혔다.
순채공파를 이룬 육패의 아들이 참판 육애(5세)이고 애의 두아들 육경(부사)과 육헌(참봉)대에서 2파로 나뉜다.
경의 후손으로 명조때 육승복(20세)과 그의 아들 육장가 다같이 절충장군으로 무명을 빛냈으며 육후문(12세)과 그의 아들 육사방이 또한 임진왜란때 공을 세웠다.
헌의 후손으로는 군자정감을 지낸 육응정(13세)과 금은 육지박(탁세) 등이 있다.
금은은 숨은 선비로 명망이 높았다. 지금도 금산용화리에는 그를 추모하는 영사재가 있다.
또 의금부도사를 지낸 금동육명환(21세)도 유고가 전해진다.
끝으로 낭장공파는 명종때 장사낭을 지낸 육한종 (10세), 명조때 통정대천를 지낸 육붕 (11세) 을 비롯해 숙종때 학자 우정 육홍운등이 있다.
우정은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났으며 『석정견고』를 남겼다.
육씨는 충북 옥천군을 비롯하여 영동·보은지방과 대전·금산지방, 전주·장수, 금천·선산·상주등에 주로 흩어져 살고 있다.
특히 대청댐 수몰로 옥천읍동안으로 이전된 시조 육보의 설단비가 다시 도시계획으로 헐리게돼 종친회에서는 이전 장소를놓고 의견들을 모으고 있다.

<지명인사>(종친회제공·무순)
▲육건성(청양고교장) ▲육굉수(한독실업고교장) ▲육동백(농박.재미교수) ▲육동언(육물산사장) ▲육동욱(전 해군대령) ▲육동천(실업가) ▲육순석(실업가) ▲육영수(전 과기처이사관) ▲육완득(실업가) ▲완완순(이대교수) ▲육인수(전 국회의원·종친회장) ▲육인순(교육사업가) ▲육장표(예비역육군소장) ▲육종수(충남대교수) ▲육종융(농박·서울대교수) ▲육종철(공박.한양대교수) ▲육종호(전대통령비서관) ▲육진봉(전 한은영업부장) ▲육진성(전 충북교육감) ▲육진영(삼양유업전무) ▲육창수(충북대교수) ▲육홍균(전 국회의원) ▲육동창(삼환기업전무) ▲육보근(실업가) ▲육내승(신한애자상무) ▲육평일(한양식품상무) ▲육완민(한양식품이사) ▲육동수(럭키금성상무) ▲육완기(전 전북내무국장) ▲육종진(이리시장) ▲육완식(육군소장) ▲육창수(약박·경희대교수) ▲육성수(외대교수) ▲육근우(육군대령) ▲육순응(회계사) ▲육근효(경영학박사·부산외대교수) ▲육완정(단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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