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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현상’ 부른 미국 민심의 변화에 주목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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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호 11면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16일 뉴욕주 시러큐스에서 유세하고 있다. 트럼프는 19일 뉴욕주 경선에서 압승을 거둬 대세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에 성큼 다가섰다. 지난 19일 치러진 뉴욕 프라이머리에서 트럼프는 60%의 지지로 압승을 거뒀다. 뉴욕시 퀸스에서 태어나 맨해튼에 거주하고 있는 트럼프는 ‘앞마당’인 뉴욕주에 걸린 95명의 대의원 중 89명을 차지해 지금까지 모두 844명의 대의원을 확보했다. 과반 ‘매직넘버 1237’까지는 393명이 남았다. 다음 경선은 26일 코네티컷·델라웨어·메릴랜드·펜실베이니아·로드아일랜드 5개 주에서 실시된다.


트럼프가 자력으로 과반을 달성할 희망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지지율 흐름으로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캠프는 혹시 실패할 경우 7월 18일부터 나흘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최되는 전당대회 1차 투표에서 후보 지명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1차 투표에서는 95%의 대의원이 이미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로 약정한 상태에서 표결한다. 전체 대의원의 5%를 차지하는 ‘비구속 대의원(unbound delegates)’의 지지를 얻어 승부를 1차 투표에서 끝낸다는 게 트럼프 캠프의 복안이다. 2차 투표부터는 61%의 대의원이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게 되는 ‘중재 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불리해진다.


주류 공화당 지도부가 아웃사이더인 트럼프를 선호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트럼프가 대선 후보에 지명될 가능성이 현재로선 가장 큰 것이 사실이다. 선풍적인 ‘트럼프 현상’이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닌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트럼프가 유세 과정에서 내뱉은 과격한 발언이 향후 어떻게 발전할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멕시코 국경에 담벼락을 쌓겠다고 하고, 후보토론회 도중 여성 사회자를 비하하고, 무슬림을 입국금지시키겠다고 했을 때 트럼프는 끝났다고 언론은 예측했었다. 테러리스트에게 물고문 그 이상도 가능하다고 했을 때, 한국은 방위분담금을 내지 않는 안보 무임승차국이라고 했을 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이제 그 효용성을 상실했으니 해체 가능하다고 했을 때 많은 전문가는 망연자실했다. 급기야 연설을 방해한다고 선거운동 본부장이 직접 시위자에게 위해를 가하고 전국 곳곳에서 트럼프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간에 주먹다툼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트럼프인가?


우선 잘 알려진 대로 ‘화난 유권자’가 가장 큰 요인이다. 이념적으로 보수이고 경제적으로 서민층인 백인 유권자들의 분노는 트럼프 현상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냉전 종식 이후 공화당은 월스트리트 친화적이고 부유층에게만 유리한 감세와 탈규제를 고집하는 정당이라는 인식이 보수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점차 자리 잡게 됐다. 2008년 금융위기의 시발점은 규제 사각지대의 거대 은행들이 저소득층을 상대로 벌인 무모한 부동산 이자 대출 전략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화당은 소수 부자만을 위한 ‘컨트리클럽(country club) 정당’이란 비판이 대두됐다. 결국 복지자본주의 시대로부터 금융자본주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소외감을 경험한 보수 백인 서민층 유권자들에게 트럼프의 존재는 단순히 막말 사기꾼이 아니다. 오히려 직언을 서슴지 않고 자신들의 답답함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아웃사이더 대변자인 셈이다.


또 다른 요인으로 정치자금과 미디어 환경을 꼽을 수 있다. 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미국민의 불신과 실망 배경에는 그들이 특정 이익집단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에 휘둘리면서 일반 서민의 목소리는 더 이상 대변해 주지 않는다는 인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의 경우 자신의 선거 운동 비용을 스스로 충당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일반 유권자가 느끼는 신선함과 신뢰감은 상상 이상이다.


다음으로, 미국이 처한 국제정세와 미국 국민의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50년대 창당 이후 자유무역과 항행보장, 문호개방 정책(해밀턴 전통)을 고수해 온 공화당은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도 당연히 우리 식으로 가야 한다는 ‘잭슨주의’로 변화하고 있다. 이 변화의 주도적 추진 세력이 공화당 내 트럼프 그룹인데, 트럼프 본인도 이전 후보토론회에서 자신이 여타 공화당 후보와 크게 구별되는 점은 보호주의 색채를 띠는 무역 정책임을 천명한 바 있다. 방위분담금을 더 내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주장이나 북한 핵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통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의 입장이 바로 트럼프의 잭슨주의 맥락이다.


트럼프라는 인물 자체도 트럼프 현상의 요인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일방적 연설 위주의 선거운동 방식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 연설 안에 특정 단어들, 예를 들어 승리할 것이며(winning), 인기도에서 앞서고 있다는(leading) 등 확신에 찬 자화자찬 격 어휘를 집중적으로 사용한다. 절대 구체적으로 길게 설명하는 법이 없고 늘 간결한 메시지를 쉽게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한 대 맞으면 몇 배로 갚아줄 것이라는 잭슨주의식 선동에 그동안 인종차별주의자(racist), 성차별주의자(sexist)라는 사회적 낙인이 내심 두려워 불만을 꺼내 놓지 못하던 보수 백인 남성 서민 유권자들이 대놓고 환호성을 올리는 형국이다.


남부 주에서 경선이 초반전에 치러진다는 것도 기선 제압이 가지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첫 경선인 아이오와에서 2등, 뉴햄프셔에서 1등을 차지한 이후 3월 초순과 중순의 수퍼화요일 및 미니 수퍼화요일에 남부 지역을 싹쓸이함으로써 트럼프는 대의원 확보 경쟁에서 절대 우위를 점하게 됐다. 남부 지역 유권자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 백인 중하층으로부터 몰표를 받는 트럼프 현상 때문에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자신의 출신 주 플로리다에서 무참하게 패배하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탄력받은 ‘트럼프 현상’이 미국과 안보 및 경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우리 입장에서 불확실성으로 인해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 저변에서 일어나는 기류 변화를 정확히 읽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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