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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박노해 아내 김진주가 엮은 ‘산업역군 내 아버지’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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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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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라듸오
김해수 지음
김진주 엮음, 느린걸음
240쪽, 1만5000원

‘산업역군’ 아버지 김해수의 기록을 ‘민주투사’ 딸 김진주가 엮어냈다는 게 책 소개글이다. 김씨는 박노해 시인의 아내고, 지은이는 ‘국산 라디오 1호’를 만든 엔지니어다. 부녀의 간단한 이력 속에 전후 한국의 격동기가 꿈틀댄다. 대립과 화해의 역사다. 딸은 엮은이의 글을 통해 말한다.

“20세기 초에 첨단의 전자공학을 공부한 엔지니어로서 그(아버지)가 살아낸 한국의 현대사는 ‘희망의 시대’이자 ‘배반의 시대’였다. 아버지가 겪어온 날들의 희망과 배반을 잊지 않고 되새겨보는 일은 지금 이 시대를 통과하는 우리 삶의 의미와 과제들을 좀 더 뚜렷하게 밝혀주리라고 믿는다.”

고 김해수 선생(1923~2005년)은 열네 살에 일본 도쿄에서 유학해 라디오 기술을 배웠다.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해방 직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에 불을 밝히며 ‘전기 의사’라고 불리었던 고향마을 스타였다. 산골 마을에 처음 전깃불이 들어오는 광경은 뭉클하다. 10리, 20리 밖의 이웃마을 사람들도 구경하러 왔을 정도다. 김 선생은 금성사(현 LG전자) 1회 공채시험에 수석 합격해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 A-501’을 만들었다. 이 라디오는 IT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산업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등록문화재 제559-2호’로 지정됐다. 이후 TV·선풍기·적산전력계·전화교환기의 생산을 총괄했다. 40대 중반에 새 길을 개척하겠다며 창업해 전자부품 국산화에 전념했다.

책은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하던 중 쓴 육필원고를 딸이 받아 정리했다. 2007년 나온 책의 개정판이다. 책을 낸 후 딸은 아버지의 라디오를 찾아 나섰다. 라디오 진품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수소문 끝에 전국을 통틀어 대여섯 대만 남았다는 걸 알게 됐다. 라디오는 개당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반열에 있었다. 사려고 해도 팔겠다는 이가 없었다. 그 중 하나를 소장하고 있는 KBS가 이달 ‘과학의 달’을 맞아 특집 다큐멘터리(5월5일 오후 10시 방영)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라디오를 복원했다. 아버지는 “순탄치 않을 세상을 살아갈 후세대를 위해 뭔가 힘이 되는 기억을 물려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전하고 싶었던 ‘엔지니어 정신’이 책 속에서 빛난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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