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면총리를 이렇게 숨겨줬다"|칼멜수녀원클레어 전원장이24년만에 처음밝힌 「피신54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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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61년의 5·16군사혁명은 한국의 역사를 바꿔놓은 고빗 길이었다. 5·16 새벽의 수수께끼의 하나는 장면총리가 스스로를 철저하게 밀폐해버린 칼멜 수녀원의 54시간이다. 당시의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거짓보고로 시간을 허송한 장총리는 멀리서 들리는 쿠데타군의 총소리에 쫓기 듯 총리공관이던 반도호텔을 떠나야했다. 처음엔 이태희 검찰총장의 지프를 이용해 계 총장 집으로 가려했으나 겁을 먹은 운전기사가 먼저 피해버려 총리승용차로 피신 길에 나섰다. 피신을 권한 측근들이 총리를 승용차에 떠밀어 태우느라 총리의 안경이 떨어져 깨어져버릴 정도였으니 그날 새벽의 허둥댐은 짐작이 간다. 반도호텔 맞은편의 미대사관→안국동의 미대사관 직원숙소를 노크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고 기다릴 시간은 더 없었다. 그럴 때 장 총리가 떠올린 피난처가 혜화동로터리의 칼멜 수녀원이었다. 그 수녀원에 피신한 총리는 외부와 연락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사태진압을 위해 총리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던 그 절박한 순간에 총리나 칼멜수녀원의 수녀들은 왜 시종 모른다고만 잡아뗐을까. 그러한 차단이 총리의 실각, 나아가 제2공화국 붕괴의 원인이 되었기에 칼멜 수녀원의 54시간은 역사의 의문으로 남아있다. 장면총리는 침울한 채 갔고 수녀들도 20여 년 내내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드디어 깨어졌다. 본사 정중수기자 (여성중앙)가 당시의 칼멜 수녀원 원장수녀였던 「클레어」여사의 입을 열게 한 것이다. 「클레어」여사가 처음으로 밝힌 5·16 새벽 54시간의 장 총리의 얘기를 간추려 옮긴다.
당시 장 총리와 만났던 칼멜 수녀원의 수녀들은 박아녜스수녀, 심마리아수녀, 원장인 「부르이·클레어」수녀 세명뿐이다.
그중 박아녜스, 심마리아수녀는 수도원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한 접대담당 수녀로 있었다.
이 세명의 수녀가운데 심마리아수녀는 현재 옮겨간 수유리 칼멜수녀원에 그대로 수녀로서 봉직하고 있고, 나머지 박아녜스수녀와 「부르이·클레어」원장 수녀는 수도원을 그후 떠났다.
처음 인터뷰를 신청했을 때 「클레어」여사는 『자신이 프랑스 공무원의 신분이기 때문에 한국에 관계된 정치적인 질문에는 일체 말할수없다』며 완강하게 거절의 뜻을 표했다. 우여곡절 끝에 허락된 인터뷰에서도 그녀는 핵심적인 질문에는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했고 오프더 레코드(기사화하지 않는다는 조건)를 조건으로 한 답변조차 하지않을 정도로 매우 철저했다.
-장면씨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내가 한국에 왔을때 장면씨가 열렬한 가톨릭 신자라는 말을 들었읍니다. 그리고 우리 수녀원을 자주 방문했고 수녀원의 운영에 여러가지로 도움을 아끼지않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읍니다』
-장면씨가 5·16당시 칼멜 수녀원에 피신하였는데 그 때의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시죠.
클레어 여사는 이 질문에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프랑스 공무원의 신분임을 거듭 강조한 후 답변이 미흡하더라도 이해하기 바란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새벽 4시 반쯤 되어서입니다. 심마리아수녀로부터 장면씨가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이 새벽에 무슨일인가 싶어 응접실로 갔습니다. 우리 수녀들은 그때 쿠데타가 일어난 줄 모르고 있었지요. 장면씨는 날 보더니 갑작스럽게 찾아와 미안하다면서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곧 수습될 것이라며 두 세시간만 머물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난그때 순간적으로 장면 씨의 처지가 상당히 위태롭다는 걸 느꼈읍니다.
그래서 수녀원 정문곁에 있는 손님방에 머물면 안전이 위험할 것 같아 원장수녀 직권으로 수녀원 안채 깊숙한 방으로 들게 했읍니다』
-그 당시 장면씨 혼자 왔나요?
『말할 수 없어요』
-승용차 운전수와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았읍니까?
『제가 말할수 있는것은 장면씨와 부인께서만 수녀원에 들어오실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 부인께서도 같이 동행하셨군요 .장면 씨의 막내 딸 명자씨(데레사)도 수녀원에 머물렀다는 말이 있던데요?
『데레사씨(서강대 졸업, 현재 45세)는 이렇게 되었던것 같아요. 기억이 오래돼 정확히 생각나지 않지만….내가 물었습니다. 명륜동 자택에 누가 있느냐고 그랬더니 막내 딸 데레사 혼자 집을 보고있다고 장면 씨가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위험할지 모르니 데레사도 이리로오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였죠.
그리하여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데레사 씨를 수녀원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 때가 아침7시 반쯤 되었습니다』
답변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신중했다. 구체적인 질문을 하면 「유도 심문에 안 넘어가요 기억이 잘 안 난다」며 핵심을 잘 피해 나갔다.
-수녀원에서 장면씨는 어떻게 지냈읍니까?
『그저 사모님과 함께 기도하시고 생각에 잠겼어요』
답변이 너무 간단하다.
-수녀원안에서 장면씨가 사태의 진압을 위해 행동을 취하는 일은 없었나요?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분은 처음엔 불의의 사태가 곧 해소되리라 생각 했던것 갈아요. 나중에 라디오를 갔다달라고 요청하기에 내가 라디오를 구해다 드렸죠. 수녀원안에선 라디오를 못 듣도록 돼 있었지요. 뉴스를 듣고 침울한 표정이었습니다…』
심 마리아 수녀는 이때의 장면 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 박사님은 무엇보다도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면서 몹시 괴로워 하셨읍니다. 마음의 안정이 안되시는지 이리저리 팔짱을 낀채 걸으며 골똘히 무슨 생각인가를 하시더군요…. 실제로 장 박사님은 그때 군부대와 직접 연락을 할수도 있었고 전화를 걸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쿠데타군과 자신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게 될 군인들이 서로 싸우게 된다면 사회혼란은 물론 또다시 북한의 남침까지도 야기시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신것 같았읍니다. 곁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저희들이 좁은 소견으로, 어서 군부대에 연락을 하시라고 말씀드렸지만 그 분은 고개를 저으며 괴로워하시더군요.
곁에서 계속 연락을 하는게 어떠냐는 권유를 받고 「안돼. 그렇게해서는 안돼요. 절대로 서로 피를 흘리게해서는」하고 고개를 저었어요』
-밖에서는 장면 씨를 많이 찾았는데…?
『제일 처음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내게 전화가 왔어요. 수녀원에 장총리가 오지 않았느냐고….난 그때 딱 잡아떼었습니다. 오시지 않았다고. 노주교님께 원장수녀로서 거짓대답을 해 지금도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그땐 그럴수밖에 없었읍니다. 전화 도청을 통해 장면 씨의 거 처가 알려지면 목숨이 위태로울것 같았거든요』
-나중에 거짓답변 했다고 노주교께 책망 받지는 않았나요?
이 물음에 「클레어」여사는 어깨를 움찔 하며 양손을 폈다. 『왜요. 노주교님은 무섭습니다. 아주 화가 나셨어요. 주교 님에 대해선 이상 묻지 마세요. 그 분은 돌아가셨고 그 분도 교구장으로서의 위치나 책임으로 날 책망했으므로 난 조금도 노주교님을 유감스럽게 생각지 않습니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찾아오지 않았읍니까?
『먼저 한창우씨(당시 경향신문사장)가 찾아왔어요. 거처를 운전기사를 통해 알았다면서….그 후 다시 장 장군이 찾아왔죠』
-그때 장면씨와 장 참모총장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까?
『난 그때 장면 씨가 그렇게 분노에 찬 표정을 지은걸 처음 보았어요.두분 사이의 대화는 밝힐수 없읍니다.』
할수없이 심마리아수녀의 증언을 다시 옮겨 당시의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장도영씨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꾸짖으시는데 곁에 서있기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왜 쿠데타를 알고있으면서 허위보고를 했느냐는 꾸지람을 하시며, 도대체 이 나라와 겨레를 어떤 지경에 빠뜨리고 싶어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장면씨의 거처가 승용차 운전수로부터 나왔다는데 다른 사람이 알고있지는 않았나요?
『글쎄요. 수녀원에서만 생활하였기에 전체적인 상황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알기로는 모 외국신부님이 장면 씨의 수녀원 피신처를 알고 계셨죠.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 장면씨 측근의 「장면씨에게 빨리 연락을 춰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할수없이 장면씨와 상의하여 비밀리에 거처를 알려 준 걸로 압니다. 그러나 여기에 관한 기억은 너무 오래 되어서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아뭏든 장면 씨는 시국이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5월18일 상오11시께 칼멜 수녀원을 나와 중앙청에서 낮12시 제69차 임시국무회의를 열었다. 그리고는「군부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은 총 사퇴한다」는 성명과 함께 야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장면 씨가 수녀원을 떠날 때 무슨 말은 안 했나요?
『별다른 말씀은 없었고 그저 신세를 져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읍니다』
-그 후엔 장면씨를 안 만났나요?
『몇 번 만났습니다. 수유리 칼멜수녀원 건축현장에도 자주 오셨고…정치적인 이야기는 일체 없었읍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나지 않았읍니까?
『5·16이 일어난 지 1주일쯤 뒤에 수녀원부지 문제때문에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때 박대통령에게 솔직히 말했죠. 내가 바로 장면씨를 숨겨준 수녀원 원장이라고…. 박대통령은 그저 웃기만하고 이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전까지 당분간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그래요. 박대통령은 그 약속을 지켰읍니다. 그리고 브로커의 농간으로 시달리던 수유리 땅문제를 해결해 주었읍니다』
-왜 수녀직을 떠났나요 그리고 어떻게 대사 비서가 되었읍니까?
『수도자의 생활, 특히 원장수녀의 직분은 책임이 무겁고 어려운 자리입니다…. 대사관에는 70년10월1일부터 일하게 되었죠.』
「클레어」여사는 수녀직을 그만둔 것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피했다. 혹시 장면씨를 숨겨주었기 때문이냐는 물음에 절대 그렇지 않다며 강력히 부인했다.
다시 화제를 바꿔 장면씨의 정치인으로서 위치를 어떻게 보고있는지를 물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장면씨는 정치를 하기에는 성품이 너무 고결했습니다. 정치가 갖는 현실적모순은 장면씨의 그 같은 고결함을 수용키 어려웠을지 몰라요. 나는 정치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장면씨의 고결한 성품을 정치가 받아들이지 못한 현실은 슬픈 거죠. 아직은 내가하고 싶은 말을 다할수 없습니다. 장면씨의 수녀원생활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밝힐수 있는 시기는 이곳 대사관 직원직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 갈때가 되겠죠. 딱 잘라 말할수는 없지만 내가 65세가 되는 5년후까지는 더 근무해야 하니까. 그 이후라면 몰라도 이전에는 곤란합니다. 지금 틈틈이 과거의 일기장을 토대로 회고록을 쓸 것을 생각 중입니다. 죽기 전에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한국 근대정치사의 올바른 자료로써 일익을 담당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아직 밝히기에는 개인적인 입장이나 시기가 적당치 않아요…』
「클레어」여사는 너무 많은 시간 이야기했다면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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