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구·호나우두·지단 함께 뛸 생각에 설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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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안에 내가 사는 스페인의 도시를 한국처럼 만들어버리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겠습니다."

10일 울산 현대의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이천수(22)는 자신감과 욕망이 펄펄 끓어넘치고 있었다. 한국 축구선수 사상 처음 세계 최고 리그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 소시에다드로 진출하는 그의 앞에는 거칠 게 없는 듯했다.

이천수는 '오기와 근성'으로 똘똘 뭉쳐 있다. 어디서 만들어진 것일까.

"엄마 뱃속에서부터 발길질을 엄청 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나를 낳지 않으려고 했는데 끝까지 살아나왔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성격이 좋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이천수의 부모는 둘째 아들 천수를 가졌을 때 딸만 셋인 큰집에 너무 미안해 낳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춘기 때 집안이 기울어 가난 속에 살아야 했던 천수는 '내가 축구를 잘 해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체격이 왜소했던 그는 남들이 자는 오전 1~2시에 일어나 훈련을 할 정도로 독종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일부러 장난치고 노는 척했다. 그래서 다른 선수들을 안심시킨 뒤 밤에 몰래 일어나 줄넘기.튜브 당기기 등 힘과 스피드를 키우는 훈련을 엄청나게 했다."

부평고 동기인 최태욱(안양 LG)은 고교 1학년 때까지 그의 우상이었다. 그는 태욱이를 따라잡고 싶었고, 가장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로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은 상황이 바뀐 것 아니냐고 하니 "그렇지 않다. 내가 조금 일찍 운이 따라줘 해외로 나가는 것뿐"이라고 했다.

"요즘은 기도발이 예술이다. 기도하는 것마다 다 들어주시는 것 같다"는 그에게 "어제는 골을 못 넣었으니 안 들어주신 것 같은데"라고 하자 "자만하지 말라고 그러신 거죠"라고 대답했다.

그는 2003~2004 시즌 후반기께에는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러시아 출신 카르핀이 뛰고 있는 오른쪽 공격수 자리를 곧 접수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데이비드 베컴(레알 마드리드)과는 몸값이나 지명도에서는 비교가 안 되지만 지난해 리그 1, 2위 팀이 비슷한 포지션의 선수를 데려왔다는 점에서 비교되는 것 같다. 지금은 내가 떨어지지만 곧 베컴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피구.호나우두.지단 등 세계적인 선수들과 함께 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그의 이번 시즌 목표는 챔피언스리그에서 골을 넣는 것이다. 그리고 이적 선수 중 최고의 활약을 한 선수로 평가받고 싶고, 팀 우승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며칠 전 인터뷰에서 그는 "야구가 싫다"는 도발적인 발언으로 또 구설수에 올랐다. "축구선수로서 축구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다. 야구가 잘 되면 축구가 안 되는 건 사실 아닌가. 요즘은 TV에서 축구 중계도 안 해주고, 스포츠 신문 1면도 전부 야구 얘기더라. 나는 축구가 더 남성적이고 매력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통해 야구가 지배하는 한국 스포츠 판을 바꿔보고 싶다." 역시 이천수다운 당돌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이천수도 지난 9일 홈 고별전을 마치고는 팬들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안 울려고 했는데 여학생들이 다 울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렇게 빨리 스페인 진출의 꿈이 이뤄진 기쁨과, 나를 위해 울어주는 팬들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합쳐진 눈물이었다."

이천수는 15일 오후 1시30분 출국, 16일 메디컬 테스트를 받은 뒤 17일께 레알 소시에다드 구단과 계약하고 19일께 귀국할 예정이다.

울산=글 정영재, 사진 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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