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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게는 무의식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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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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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

시쳇말로 ‘멍 때리다’라는 표현은 ‘몽상’의 일종이다. 우리 뇌는 자신도 모르게 ‘의식의 밧줄’을 놓아버릴 때가 있는데, 그 몽상의 시간이야말로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경계가 살짝 흐트러지는 순간이다. ‘나는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에고(ego)의 인식이 사라지는 순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은 몽상이 한껏 나래를 펴는 시간이다. 의식(consciousness)은 어떤 의도성을 가진다.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가 의식적인 것인데, 몽상은 그런 의식의 힘찬 고삐를 잠시나마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식은 행동을 통제, 지휘하지만 동시에 잠재된 무의식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몽상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든다. ‘의식’의 낚싯대로 ‘무의식’의 광대한 바다에 잠재된 사유의 물고기를 낚는 것이야말로 심리학의 필수 과제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서로 가장 다른 점이 바로 이 ‘무의식’의 존재가 아닐까. 인공지능에는 무의식이 없다. 인공지능은 모든 것을 의식한다. 인공지능에서 의식의 여집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는 원칙적으로 모든 데이터를 종합하고 분석해 최선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리하여 인공지능은 꿈을 꾸지 않는다. 어떤 쓸데없는 몽상도, 멍 때림도, 먼산바라기도 하지 않는다. 의외의 순간 솟아난 우연한 발견, 뜻밖의 계기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눈부신 유레카’의 순간이 없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네 번이나 이겼을 때도, 알파고는 환호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은 마치 자신이 패배한 것처럼, 인류 전체가 패배를 맛본 것처럼 가슴 졸이며 슬퍼했지만 알파고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알파고는 바둑을 둔 것이 아니라 ‘계산’을 했을 뿐이기에. 인간에게 바둑은 게임이자 예술이자 인생의 축소판이지만 알파고에게 바둑은 끝없는 계산의 연속일 뿐이었다.

우리가 ‘인공지능이 세계 최고 수준의 바둑기사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에 상처를 받는 이유는 과학의 발전이 ‘내 일은 이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자부심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알파고의 첫 번째 충격은 바로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 즉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우리에게 준 두 번째 충격, 그것은 ‘과연 우리가 과학의 발전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다. 과연 우리는 과학의 발전속도에 짓눌리지 않고,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공생할 수 있을까. 세 번째 충격은 바로 인공지능 쇼크가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자체를 급격하게 뒤바꿀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이 대결은 ‘인공지능 vs 인간’의 바둑 대결로 보였지만 실은 ‘기계로 인간의 능력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vs ‘살아 있는 인간의 아날로그적 지성과 감성을 믿는 사람’들이 벌이는 가치관의 대결이기도 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만의 글쓰기’를 가능하게 했던 것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경험과 나도 모르는 무의식의 합작품이었다. 아직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우리의 영혼을 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게도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식의 변화가 찾아왔다. 바둑기사들은 단지 인공지능을 ‘적수’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알파고를 통해 새로운 사유의 방식을 체득하고 있었다. 전문가들도 해설이 불가능한 기상천외한 ‘신의 한 수’를 두는 알파고를 보면서 나는 두려움과 함께 경이로움도 느꼈다. 바둑기사들이 알파고를 통해 획기적인 사고의 방식을 배우는 것처럼 나 또한 인공지능과 ‘대화’하며 새로운 글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더욱 ‘큰 그림’으로 그려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들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몽상할 자유, 먼산바라기를 할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비로소 깨닫는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대단한 인공지능의 시대가 와도, 나는 반드시 지키고 싶다. 몽상할 권리, 꿈꿀 권리, 내 무의식의 유일한 주인공이 될 권리를.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