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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몰래 내다 버리고 싶은 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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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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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벚꽃 흐드러진 봄밤이었다면 운치라도 있었을까. 하지만 그날은 칼바람이 살을 에던 세밑 언저리. 심야에 일을 마친 남자의 호주머니엔 버스비로 쓸 백원짜리 몇 닢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추위와 싸워가며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한 지 세 시간여. 마침내 집 앞 구멍가게에 다다른 그의 눈에 낯익은 형체가 들어왔다. 아내였다. “어, 자기 왔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그는 도대체 언제부터 기다린 건지 묻지 않았다. 그저 아내의 꽁꽁 언 몸을 으스러지도록 꼭 안아주었을 뿐.

언젠가 친구가 술자리에서 이 얘길 들려주었을 때 나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다. 스무 해 전, 가난한 무명의 음악가였던 그의 곁을 따뜻하게 지켜준 아내가 있었던 게 고맙고 또 고마워서…. 무명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은 그는 그래도 행복하다고 했다. 성장기 내내 폭력적인 아버지와 끊임없이 불화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 가족에게 입었던 고통을 이제 새로 얻은 가족의 사랑으로 말끔히 치유받는 중이었다.

자식 죽이는 부모, 부모 죽이는 자식에 대한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요즈음. 문득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말이 떠올랐다. “가족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다!” 끔찍한 범죄에 이르진 않더라도 화기애애한 TV 속 가족 드라마는 판타지일 뿐, 실상 많은 이가 다름 아닌 가족 때문에 상처받고 있음을 대변하는 얘기라서다. 다케시 감독 역시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형제들과 살해를 모의했다가 미수에 그친 비극적인 가족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내 친구처럼 그도 상처를 낫게 해줄 진실한 사랑을 만났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크나큰 아픔을 빛나는 예술혼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듯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피로 얽힌 가족은 ‘디폴트(기본 설정)’로 주어진 관계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엮여버린 인연이다. 남에겐 하기 힘든 말, 할 수 없는 행동을 가족에게 함부로 해대는 것도 바로 그 때문 아닐까. 맘에 안 든다 한들 어차피 바꿀 수도 없는 사이이니 아무렇게나 대하든 대수일까 싶은 게다. 그래선지 ‘남보다 못한 가족’이 도처에 넘쳐난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다들 예의 차리고 눈치도 살펴가며 생판 남남끼리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드는 세상이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선보인 다큐멘터리 ‘트윈스터즈’의 주인공들은 이런 비정한 세태를 아프게 꼬집는 메시지를 던진다. 각기 미국과 프랑스로 입양돼 서로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다가 25년 만에 재회한 한국계 쌍둥이 자매 서맨사와 아나이스.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판박이처럼 닮은 혈육을 만난 기적 같은 사연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아직 친부모를 찾지 못한 자매는 자신들을 버린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입양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몰랐을 것 아닌가. 우리는 피를 나눈 사람만이 가족이 아니란 걸 안다. 내 인생에 받아들이기로 한 모든 사람이 가족이다.”

피가 아니라 사랑으로 기꺼이 내 삶에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가족’이란 자매의 말을 곱씹다가 언뜻 한 지인을 떠올렸다. 외아들을 둔 그이는 아들 친구 여섯 명과 해마다 한 번씩은 꼭 여행을 다닌다. 수시로 그네들을 불러 같이 밥을 먹고 생일을 챙겨주며 문자를 주고받은 지가 벌써 10여 년째다. 아들이 예쁘니 친구들까지 예쁜 모양이라며 넘기기엔 유난한 수준이라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나중에 아들 하나만 세상에 남겨놓고 갈 생각을 하니 너무 외롭겠다 싶은 거야. 우리 부부가 떠나도 함께할 가족을 만들어주면 좋잖아. 아들의 형제가 돼줄 아이들이니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벌써부터 자기 장례식 때 일곱 아들이 다 같이 관을 나르고 위로와 격려를 나눌 생각을 하면 흐뭇하다나.

그러고 보니 그이야말로 최고의 투자를 하고 있지 싶다. 가족 파탄과 고독사가 일상이 돼버린 시대, 사람을 저축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일이 또 있을까. “피를 나누었든, 나누지 않았든 아프고 외로울 때 힘이 돼줄 진정한 가족이 있습니까?” 당신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