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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5)제82화 출판의 길 40년(18)삼중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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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7면

일제하인 1931년 6월에 창립하여 2대를 이으면서 출판을 통해 우려의 근대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아마도 삼중당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 주인공은 1대 창설자인 서재수 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2대 서건석 군이다. 그런데 이 글의 연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지난 3월 24일 2대 서군이 급환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 나이 52세,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군은 선친의 성업을 기반으로 하여 그 후 격변하는 시대와 다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면서 출판물을 창출·개발, 삼중당을 새롭게 발전시켰으며, 따라서 출판계는 그의 지혜로운 역량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던 터였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삼중당을 안 것은 휘문 학교 학생 시절. 그 무렵 20세를 갓 넘은 약관의 서재수 형은 3, 4평 정도의 가게 안에서 그저 동그란 의자 하나를 놓고 장사하는 헌 책방의 주인이었다.
당시 동료 업자였던 일성당의 황종말 형, 통문관의 이겸노 형들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그는 매우 부지런하고 항상 겸손했으며 대인관계가 원만했다고 한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나는 그와 사뭇 교유를 가져왔는데, 그야말로 한국 출판사에 정통으로 기록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출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을 마치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리듯이 구비해 온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서점과, 해방 직후 도매상을 경영하는 등 일선 경험을 통하여 출판의 기초를 다졌으며 그후 출판에 전념하게 되는데, 처녀 출판으로 안중근 의사의 보기인 『할빈 역두의 총경』 을 냈다. 이어 우리나라 역사책인 육당의『고사통』, 편지글을 모은『춘원서간문 범』 등을 출판했는데, 일제하 출판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었던 그 시절로서는 요즘 말로 독자에게 어필하는 탁월한 그의 기획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3원 80전 짜리 『고사통』이 날개돋친 듯 말려 나가던 당시의 정황을 생전의 서 형은 신이 나서 자랑하곤 했었다.
그는 새로운 독자의 광맥을 찾으면서 대량 판매의 시장을 개척한 출판 사업가였다. 그러면서도 저급한 대중 취향에 영합하지 않는 한계를 명확하게 지켰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1978년 11월 작고할 때까지 40여년동안 단행본·문고· 전집류·주간지·월간지, 그리고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활자로 만드는 것이라면 안 만들어 본 물건이 없을 정도였다.
해방후 삼중당의 업적을 더듬어 본다. 잡지류로서 월간 『수험 연구』(1953), 월간 『아리랑』(1955), 아동지 『만세』(1956), 월간 『화제』 (1958), 최초의 종합 주간지 『주간 춘추』 (1959), 월간 『지성』 (1962), 순문예지 『문학 춘추』 (1963)등을 발간했으며, 중요한 전집류로는 『이광수 전집』 (전 20권),『「펄·벅」 선집』 (전12권) , 안병욱·함석헌·외저『나의 사상적 자숙부』 (전 5권), 박목월·정충량 외저 『가정대 백과사전』 과 『현대 여성 백과사전』 (전 6권) 등을 비롯하여 10여종의 기획 출판물이 더 있다.
특히 1959년에 발간된 최요안 편 『마음의 샘터』는 부년의 베스트셀러였을 뿐 아니라 그 후 5, 6년간을 계속해서 베스트 셀러의 목록에 올랐던 책으로 길이 기억될 만한 밀리언셀러였다.
서재수 형은 1968년 서울시 문화상을 탔는데, 그는 수상 통지를 받은 날 아침 다음과 같은 자작시 하나를 써서 남겼다.
육십평생 일이관지
출판보급 어려워라
가시덤불 헤매다가
서산낙일 저물었네
이후에란 물결따라
분수대로 늙으리라 정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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