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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지우개와 전기자동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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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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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재계의 제갈량’으로 불린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많은데 대개 재계 입장을 대변하는 쪽이다. 직업정신 때문일 것이다. 3년 전 그는 지우개론에 푹 빠져 있었다. 모든 규제를 단칼에 지우는 지우개, 그는 한국 경제의 살길이 거기 있다고 했다. 그때 그는 관광업을 예로 들었는데, 거칠게 옮기면 이랬다.

“미국 국립공원에 가보라. 옐로스톤에는 유황천 한가운데까지 길이 있다. 관광객이 보고 싶은 곳일수록, 절경일수록 쉽게 갈 수 있다. 불판, 고기 굽는 시설, 전기까지 다 갖춰놨다. 스위스는 더하다. 모든 산 정상까지 트램이 다닌다. 우리는 어떤가. 절경은 막아놓기 일쑤다. 환경단체가 반대해 케이블카도 못 놓는다. 그러니 몰래 가서 훼손한다. 절경은 건장한 청춘남녀의 전유물이다. 어린이와 노약자는 천왕봉 구경 한 번 못한다. 관광도 죽고 환경도 죽는다. 이런 루저-루저 게임이 없다.”

국토의 70%가 산인데 환경 규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된다. 그걸 지우개로 풀자. 유커 1000만, 2000만 유치에도 도움이 된다. 중국 관광객 어렵게 모셔놓고 보여줄 곳이 없어 명동에서 군것질이나 시키는 게 말이 되나. 뒤에 듣자니 그는 사람 만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2년쯤 지나 그는 다른 걸 들고나왔다. 이번엔 ‘정부 역할론’이었다. 예로 든 게 항공기 정비수리(MRO) 산업이다. 역시 거칠게 그의 말을 옮기면 이랬다.

“항공기 MRO는 뜨는 산업이다. 비행기는 한 대에 부품이 600만 개 들어간다. 하나라도 고장 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20년 이상 유지보수가 필요해 한 번 고객을 잡으면 오래간다. 관광 수요가 늘면서 비행기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시장 규모는 643억 달러, 2025년엔 960억 달러로 커진다. 이런 산업은 국가가 활주로며 성능시험장 같은 인프라를 깔아줘야 민간이 뛰어들 수 있다. 도로·통신망이 깔려야 자동차·ICT(정보통신기술) 산업이 클 수 있는 것과 같다. 중국·싱가포르는 국가가 나서 대대적인 항공산업단지를 조성 중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뿐이다.”

알아보니 국토교통부는 2014년 2월 “항공기 MRO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며 대통령에게 이미 업무보고를 했다. 그러자 업체 두 곳이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유치전에 나섰다. 하지만 국토부는 2년이 넘도록 묵묵부답이다.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자 청와대와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국내 저비용항공사(LCC)는 정비불량으로 회항·결항을 밥 먹듯 하고 있다. 국내 기술·장비·인력이 달려 해외에 정비를 맡기느라 쓴 돈만 2014년 7560억원이다. 새 국가 먹거리로 항공기 MRO를 개발하기는커녕 돈과 안전을 다 잃고 있는 것이다.

이 부회장의 말을 장황하게 옮긴 건 총선이 끝났기 때문이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나 규제 프리존 특별법은 대표적인 지우개법이지만 19대 국회는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고 야당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좋은 길을 놔두고 한국 경제는 굳이 험한 길로 돌아가는 중이다. 선거 때문에 미루고 선거 끝나서 안 하고…. 20대 국회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부라고 다를까. 환경부는 11일 전기차 충전을 유료화했다. 요금도 1kwh당 313.1원으로 싸지 않다. 보조금도 줄이고 충전기 지원금도 삭감했다. 민간 사업자 육성이 명분이지만 그 전에 국내 전기차 산업이 먼저 말라 죽을 판이다. 한국은 그러잖아도 충전기 1대를 17.5대의 전기차가 쓰고 있다. 미국의 전기차 2대당 충전기 1대와는 비교도 안 된다. 미국의 테슬라라도 이런 낙후한 인프라로는 ‘모델3’ 프로젝트 같은 창조·혁신을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그렇게 지우개는 국회에서 막히고 정부는 제 역할이 뭔지조차 모른다. 중간에 낀 경제만 죽어나고 있다. 국회 탓만 하는 정부, 정부 탓만 하는 정치가 만들어낸 정치 과잉의 자화상이다. 총선은 끝났다. 그렇다고 지우개가 살아나고 전기차가 쌩쌩 달릴 것 같진 않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