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속 미술, 아는 만큼 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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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32면

저자: 정장진 출판사: 미메시스 가격: 1만6800원

책 표지부터 요상하다. 껍질이 반쯤 벗겨진 바나나 속에 나체의 금발 미녀가 서있다. ‘치키타(Chiquita)’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팝 아트 화가 멜 라모스(81)가 그린 그림이다. 치키타는 바나나를 주로 파는 미국의 브랜드. 저자는 왜 이 그림을 표지로 쓴 것일까.


라모스의 섹스어필하는 핀업 걸 그림은 국내 한 음료회사가 만든 옥수수수염차 광고 그림과 거기에 영향을 미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으로 절묘하게 이어진다. 저자는 말한다.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콘텐츠 영역이 개발되면서 원형 이미지들이 형태를 바꾸어 다시 태어난다. 멜 라모스를 비롯한 팝아트 화가들은 이 점을 잘 알았다. 따라서 옥수수수염차의 비너스나 바나나 껍질 속의 비너스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따라한 아류나 모방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원형 이미지의 진화에 해당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도 그리스 미술이나 더 멀리는 신화 속에 원형으로 존재했던 비너스가 ‘회화’라는 미디어를 통해 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151쪽)


저자가 주목한 것은 광고 속 미술이다. 그래서 “광고는 언제나 한 시대의 징후이며 기호”이므로 “광고를 연구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 미술사는 죽은 미술사(美術死)”라고 일갈한다. “미술을 알아야 광고가 보이고 광고가 보이면 시대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책은 고대 이집트부터 르네상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시대별 주요 작품과 여기에서 파생하고 변주된 광고에 얽힌 뒷얘기를 흥미진진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광고의 이미지가 기실 어떤 작품에서 연유되었는지, 그 작품이 미술사에서는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그 작품은 다른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저자의 구수한 입담은 끊이질 않는다.


예를 들어 다양한 광고에서 사용된 ‘밀로의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며 ‘카논(cannon)’이라는 인체 묘사의 규범을 설명한다. 유두 사이의 거리는 각 유두에서 배꼽까지의 거리와 같아야 하고 또 이 거리는 배꼽부터 음부까지의 길이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인데, 8등신에 적용되는 카논은 기성복을 대량생산할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애플 열풍을 다루며 내놓은 표지도 인상적이다. 독일 르네상스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담과 이브’를 패러디해 사과 대신 아이팟을 받아들고 고민에 빠진듯한 모습은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더욱이 크라나흐가 마르틴 루터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루터가 이뤄낸 종교개혁과 스티브 잡스가 방점을 찍은 IT 혁명과 묘하게 어우러지며 미처 생각지 못했던 퍼즐 조각이 딱 들어맞는 듯한 쾌감마저 준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어떤가. 보험회사부터 청바지회사까지 젊은 남자의 나신을 제대로 또는 적당히 가려가며 활용한 재치가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대목은 다비드의 시선과 돌을 쥔 유난히 길고 큰 오른손이다. 골리앗이라는 거인을 이기기 위해 소년이 심사숙고하는 표정은 뭐라 말하기 힘든 뭉클함을 준다. 조각가 로댕은 이 작품을 돌 던지는 다비드가 아닌 ‘생각하는 다비드’로 알고 있었다. “나를 진정한 조각가로 만들어 준 사람은 미켈란젤로”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이자 불세출의 걸작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게 된 이유이기도 할 터다.


작품에 얽힌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책읽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미켈란젤로가 죽을 힘을 다해 그려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남성들의 나체가 볼썽사납다 하여 주요 부분에 덧그림이 그려졌는데, 최근에 화학 약품을 이용한 세척 및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특히 ‘천지창조’의 경우 NHK가 복원비용을 부담하고 대신 복원과정을 독점방영했다니 그 과정이 어땠는지 새삼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개안을 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책을 다 읽고나면 주변에 있는 그림 하나, 사진 한 장조차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그만큼 새로 관심이 생긴 것들이 많아진 때문이리라.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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