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격」싸고 마지막 실랑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중공어뢰정 송환교섭이 4일만에 막을 내렸다. 이번 교섭을 맡았던 외무부는 장관이하 관계직원이 거의 매일밤샘을 해가며 이 일에 매달렸다.
중공측과의 교섭을 맡았던홍콩총영사관과 본부와의 교신된 전보만도 몇아름이 넘었다.

<선상반란에 관심집중>
○…22일하오 처음 사건이보고됐을때는 사고어뢰정에 대한 법적지위를 어떻게 볼것이냐가 정부관심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발생하루만에 이원홍문공부장관이 『난동자들이정치걱 목적이 없었다』는 말로 긴급피난의 성격임을 간접적으로 흘림으로써 사건자체가 단순화 되었다.
당초 실무자들은 이번 사건이▲긴급피난인 경우▲반란인 경우▲정치적 망명인 경우등 세가지 경우를 상정해 각항목마다 대응책안을 마련했다.
23일 낮까지만해도 사실조사가 끝나지 않았던 상황이어서 실무자들은 반란이 성공한 군함일 경우에 중점을 두어 대응책을 마련했다. 그렇게되면 함정과 나머지 승무원은 보내되 해적행위가돼 난동범인은 우리가 처벌하게된다.
그러나 사실조사의 결과가 그렇지않아 이안은 채택될 필요가 없었다. 결국 긴급피난과 구조의 법리에 따라 선박 및 난동범인을 포함한 모든 승무원을 송환한다는 선이 정해졌다.
실무자들 중에서는 범인을 포함해 모든 승무원을 보내더라도 부상자들은 치료 필요도 있으니 좀더 체류시키는게 좋지 않느냐는 의견도 냈으나, 이 사건으로 빌미를 잡는다는 인상을 중공측에 주는 것은 떳떳치 못하다는 의견이 많아 일시에 전원송환으로 낙착.
이원경외무장관도 『이런 골치아픈 사건은 빨리 끝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서도 정부는 골칫덩어리를 없앤다는 차원에서 교섭을 서둘렀던것 같다.
지난번 민항기사건때에 이어 노총리는 이번에도 외무부의 아주국장등으로부터 직접 교섭진행사항을 보고받았으며 홍콩에서 도착한 전문도 직접 챙겼다는 후문이다

<중공축 시인에 낙관>
○…함정의 성격이 결정되자 남은 문제는 중공군함이 우리영해에 들어와 3시간이상이나 버틴 영해 침범에 대한 중공의 사과를 받아내는것이었다.
23일 저녁부터 한·중공간교섭의 초점은 사과내용과 방식으로 모아졌다. 중공외교부가 영해침범사실을 시인하고 교섭에 나선 중공의 신화사홍콩분사관계자들이 처음부터 사과할 용의를 선선히 알려와교섭이 잘 풀려나갈것으로 모두 낙관했다.
일요일인 24일 이상옥차관은 『함정의 성격이 분명하게된이상 남은문제는 중공측의사과뿐』 이라며 『민항기교섭때만큼밖에 시일이 걸리지 않을것』 이라고 말해 교섭에 상당한 진척이 있음을 시사했다.
중공측은 24일 저녁 홍콩총영사관에 사과내용을 구두로 알려와 우리측의 만족여부를 타진했다. 중공은 이때영해침범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관련자조치등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문제된것은 이 각서의 형식이었다. 우리는 정식 외교관인 총영사가 서명을 하는데 반해 중공측은 비록 국무원의 직속 기관이긴하나 뉴스를 제공하는 통신사 간부를 상대로 한다는것은 역시 격이 맞지 않을뿐더러 공식적 성격이 약했다.
정부는 이때부터 중공의 제안을 방아들일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관계장관회의를 여는등 진통을 겪었다. 이통에 이원경 외무장관은 장관실에서 24일밤 꼬박 밤샘을 하고 새벽4시에야 퇴청했다.

<발표전 미·일에 통보>
○…우리측의 결론은 상대방의 격을 높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중공이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다는 핑계로 외무성간부의 등장을 회피한데 반해 우리로서는 최소한 누가 보든지 국가기관으로 인정할수 있는 기관의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가 상대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민항기때 심도중공민항총국장이 대표가 됐듯이 이번에도 항만해운기관의 장이나 해역사령관 정도의 서명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공측은 신화사통신이 국가기관임을 내세우면서「중화인민공화국외교부의 수권에 의해서」라는 문귀를 집어넣겠다고 수정 제의해왔다. 이때가 25일 저녁이있다.
우리측은 이를 방아들이기로 결정한뒤 이때부터 송환지점·절차·부상자처리등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