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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목소리'가 달라졌어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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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사관 OOO이다. 금융범죄 사기범 일당을 검거했는데, 압수현장에서 당신 명의로 된 대량의 대포통장이 발견됐다. 당신은 사건과 관련하여 고소⋅고발된 상황이다. 당신이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아직 모른다, 피해자라면 우선 피해자 입증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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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그놈목소리'의 절반 이상은 이런 식으로 정부기관을 사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검찰·경찰·금융감독원 등 공공기관 직원을 사칭해 심리적 압박을 준 다음, 피해자를 도와주는 것처럼 접근했다. 보이스피싱 사기에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개인정보유출' '대포통장 연루' 등이었다.

그런데 요즘의 '그놈목소리'는 좀 달라졌다.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의 절박한 심리를 악용하는 대출빙자형이 많아졌다. 이런 식이다.


[사례①] 신용등급 상향을 위해 변제명목으로 입금을 유도

"저희 쪽 데이터 상으로는 (고객님 신용이) 조금 부족하세요. 이 조건을 고객님이 조금 풀어주시고, 오늘 중으로 자금을 받아 보시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지금 OO캐피탈 쓰고계시죠. 거기에 일부 변제를 해주셔야 되요.”

☞ 사기범은 피해자가 과다대출을 받고 있어 대출조건에 맞추려면 일부를 갚아야 한다고 속이면서 사기범의 계좌(대포통장)로 돈을 보내라고 유도


[사례②] 전산상 대출 가능조건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선입금 요구

“저희가 대출금(5000만원)을 입금했는데, 전산상으로 고객님 코드가 막혀서 현재 입금이 안 됩니다. 이걸 풀어야지만 돈이 입금이 돼요.”

☞ 사기범은 전산상 대출 가능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속이면서 전산해제를 위해 360만원을 입금해야 한다며 선입금을 요구


[사례③] 편법대출 진행을 위해 추가 입금을 요구

“저희가 대출을 진행하면, 금감원에 신고가 들어가는 게 있어요. 근데, 담당자가 고객님 기록 삭제하는 과정에서 금감원 모니터링에 걸렸나 봐요......간단하게 (말해서) 담당자가 지급정지가 걸렸구요. (대출)진행을 못했습니다. 다시 한 번 90만원 입금기록을 잡아주시면, 저희가 다시 1090만원 30분 안에 돌려드리겠습니다.”

☞ 사기범은 피해자에게 전산상 지급정지를 풀기 위해서는 90만원을 입금을 받은 후에도 다시 금감원 모니터링에 걸렸다며, 추가 해제를 위해 90만원을 더 입금해야 한다고 요구


[사례④] 신용관리 명목으로 비용을 요구

“고객님 등급이 현재 8등급으로 확인되는데요.…고객님 신용관리를 위해 평점, 등급 등의 변경을 하려면, 저희가 권한을 받아와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 임의로 대출을 1건 진행할 거고요... 그 부분에 있어 비용청구가 들어갈 겁니다.”

☞ 사기범은 피해자에게 편법으로 좋은 조건의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며, 신용관리 명목으로 비용을 요구



이런 방식의 대출빙자형 금융사기 피해액은 올 1~2월 141억원으로 집계돼 전체 피해액의 66.5%에 달했다. 보이스피싱 양태가 달라진 것은 지난해 7월부터 '그놈 목소리'(사기범 실제 목소리) 222개가 집중 공개됨에 따라 정부기관 사칭형 보이스피싱에 대한 국민의 대처능력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성수용 불법금융대응단 부국장은 "사기범들은 최근 들어 국민들이 정부기관 사칭형 수법에 잘 속지 않자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의 절박한 심리를 악용하는 대출빙자형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대출빙자형 사기범들은 생활이 곤란한 저신용자·저소득층 또는 고금리 대출을 받고 있는 다중채무자 등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다. 사기범들은 신용등급 상향, 대출보증료, 편법대출 진행비 등의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수법을 사용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금감원은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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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복고풍인 납치형 보이스피싱 신고도 늘어나고 있다. 아들·딸 등을 납치하고 있다며 거짓말을 하면서 돈을 요구하거나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수술비를 보내라고 하는 사기다. 금융감독원 성수용 부국장은 "실제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목소리를 공개하기 이전인 2009년 당시 많이 악용됐던 납치형 보이스피싱 신고도 다시 들어오고 있다"며 "국민이 목소리를 통해 간접체험하지 못했던 과거 방식을 사용하는 등 사기꾼들도 계속 머리를 쓰면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출처가 불분명한 대출권유 전화 또는 문자메시지를 받으면 반드시 해당 금융회사에 직접 문의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달라고 강조했다. 또 서민 대출중개기관인 한국이지론(주)을 이용하면 불법적인 대출중개로 인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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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기자 prax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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