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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일본 기행] 8. 거세지는 지방분권 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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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도쿄(東京)에서 북쪽으로 1백km쯤 떨어진 도치기현 현청 소재지인 우쓰노미야(宇都宮)시는 1980년대만 해도 간토(關東)지역 동북부의 경제 중심지였다.

마쓰시타 전기 등 대기업의 공장들이 몰려 있었고, 도쿄의 돈이 대거 흘러들어와 백화점.상점가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장기불황의 터널을 지나면서 공장이 잇따라 문을 닫거나 규모를 줄이면서 우쓰노미야는 '유령도시'로 몰락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우쓰노미야를 찾았다. 길을 사이에 두고 중심가에 마주 서 있는 우에노.세이부 백화점은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2000년, 2002년에 문을 닫았다. 역 앞의 로빈손 백화점이 문을 열고 있으나 오는 9월 폐점할 예정이다.

상업 중심가인 바바초(馬場町)의 상점 수도 10년 전 1백60여곳에서 지금은 48곳으로 줄었다. 그나마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다.

후쿠가미 다카히토(福上孝仁) 바바초 상인회장은 "이 지역 경제는 제로"라며 "이 상태가 계속되면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라고 푸념했다.

비교적 사정이 괜찮다는 유니온 거리에서 4대에 걸쳐 1백31년 동안 건어물 가게를 하고 있는 나가시마 도시오(長島俊夫)는 "10여년 전에는 하루 매출이 40여만엔이었는데 지금은 15만엔에 불과하다"며 "지금이 가게 문을 연 이래 가장 어려운 때"라고 말했다.

장기불황 속에 지역 경제가 망가진 곳은 여기만이 아니다. 지역마다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고, 지방자치단체들은 혐오시설 유치도 마다하지 않는 등 살길 찾기에 바쁘다. 사정이 이런데도 중앙정부의 규제가 여전히 심하자 참다 못한 지자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搏)돗토리(鳥取)현 지사가 정부의 지방분권 개혁추진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니시무라 다이조(西室泰三) 도시바(東芝)회장을 겨냥, "도시바 상품 불매운동을 펼치겠다"고 '협박'해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추진회의가 마련한 지방재정 개혁안이 지방들의 최대 희망사항인 '세금의 지방 이양'에 매우 소극적이자 이런 식으로 항의한 것이다.

가타야마 지사는 47개 광역지자체 지사 가운데 '개혁파'로 꼽히는 9명이 지난해 만든 지사연합의 회원이다. 이 모임의 주장은 한마디로 "중앙정부가 지방의 모든 일에 간섭해 '감 놔라 배 놔라'하지 말고 권한을 과감히 넘기라"는 것이다. 자치 단체장들이 중앙정부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언론들도 이들을 지원한다. 도쿄신문은 지난달 29일 '지사는 국가와 투쟁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지역을 살리지 않고는 일본 재생이 불가능하다"며 "개혁파 지사들이 분권시대의 선도자가 돼 달라"고 주문했다.

지사연합은 교수 8명, 경제계 인사 7명과 함께 지난해 지방분권연구회를 만들었다. 일본 재계의 간판인 오쿠다 히로시(奧田碩)도요타자동차 회장 겸 게이단렌(經團連)회장도 회원이다.

이 연구회의 다카하시 요시유키(高橋喜幸) 연구원은 "경제.복지.교육 등 각 분야에서 지방분권이 가능한 것들을 찾아 정부.정치권에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회는 지방을 이끌 인재 양성에도 적극적이다. 내년부터 매년 7월 지사연합 소속 9개현의 고교생 1백60명에게 후쿠오카(福岡)현의 한 기업연수원에서 2주간 국제사회 등을 주제로 연수를 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중.고 6년제 국제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다.

지난달 18일에는 사사키 다케시(佐佐木毅) 도쿄대 총장, 모기 유자부로(茂木友三郞)기코만 사장 등 학계.경제계 인사들로 이뤄진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국민회의'가 "'관료.중앙집권.무당파'에서 벗어나는 3탈(脫)운동을 펼치겠다"고 선언했다.

무당파(無黨派)란 정당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국민회의는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할수록 감시 기능이 약해져 정치가 더욱 형편 없어지고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본다"며 "정당이 확실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불황 속에 급증한 것은 정치.정당에 대한 실망과, 투표를 하지 않거나 비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다. 지난 4월 지방선거의 의회 선거(52. 48%)와 지사 선거(52. 63%)의 평균 투표율은 역대 최저였다. 전국의 지사 47명 가운데 무당파가 11명으로 늘었다.

후쿠시마 미즈오(福島瑞穗) 사민당 간사장은 "정치인들이 국가예산을 이권에 따라 배분하는 등 국민보다 자신들을 먼저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빚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가와사키(川崎)시 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스즈키 다쓰로(鈴木達郞)는 "'자민당만 아니면 찍어줄텐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국회에서 지자체로 활동무대를 옮긴 정치인도 많다. 민주당 의원을 그만두고 지난 4월 무당파로 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한 마쓰자와 시게후미(松澤成文) 가나가와(神奈川)현 지사는 "국가의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내 고향을 살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쿄도지사도 '도쿄를 바꿔 국가를 바꾸자'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지방이 바뀌어야 일본이 바뀐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시민들도 '새로운 시민 정치를 만들자'고 나서고 있다. 지난 5월 24일 도쿄의 도시마(豊島) 구민센터에선 시민단체들이 '무당파에서 시민파로'란 주제의 심포지엄을 열었다.

지난 4월 지방선거에서 시민운동가 16명을 지원해 4명을 당선시킨 시민단체 '맹약(盟約)5' 의 이마이 하지메(今井一) 기획.운영위원은 "투표율이 낮을수록 정당조직의 힘은 커지고 정치개혁이 안 된다"며 "시민파가 연계해 국민생활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네코 마사루(金子勝)게이오대 경제학 교수는 "장기불황으로 발생한 숱한 문제를 누구도 책임지지 않자 시민들이 스스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선 장기 불황을 거치는 동안 환경.교육 등 여러 분야의 비영리기구(NPO)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1만1천여개에 이른다. 정부와 기업도 '시민의 힘'을 인정한다.

NPO의 설립.운영.연수를 지원하는 민간기관 '일본 NPO센터'의 다지리 요시미(田尻佳史)사무국장은 "과거에는 정부.기업과 NPO가 대립했지만 지금은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며 직원들을 NPO에 연수보내는 정부기관.기업이 늘어나는 등 협력을 모색하는 추세"라며 "NPO는 정부와 개인 간의 틈새를 메우는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미즈코시 신(水越伸)도쿄대 정보학 교수는 "일본은 '주변으로부터의 개혁시대'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일본의 변화는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관이 아닌 민간에서 도도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도쿄=오대영.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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