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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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낙네들은 돌아가고 아저씨는 라디오 뉴스 들으러 들어가고 박군과 내가 남아서 작업장 청소를 했다. 박군은 마당에서 고무 호스로 물을 끌어다 시멘트 바닥에 번진 밀가루며 발자국들을 말끔히 지워 나갔다. 그리고 조리 도구와 함지 등속도 깨끗이 씻어 두었다. 우리는 아직은 서로 서먹한 채로 방으로 돌아갔다. 박군은 이 근처 사천에서 왔다고 했다. 그도 군대 가기 전에 적당한 일거리가 없어서 빈둥거리다가 이 집을 찾아 왔다고 말했다. 사장 아줌마는 사람이 좋고 수완도 있어서 학교 급식도 여러 군데를 맡았고 형편이 어려운 보육원도 돕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제빵 기술은 아저씨가 일제 때 부산에서 배웠다는데 정식의 큰 제과점을 내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방에서 재료도 변변히 구할 수 없어서 우유 식빵을 조금씩 구워 내는데 아직 '인식들이 없어서' 인기가 별로라고 그는 말했다. 이 집에서 내는 물건 중에 제일 인기가 좋은 것은 역시 속에 팥을 넣은 '앙꼬빵'이었다. 크림빵은 얼마 전에 막 시작을 했다고 한다.

저녁은 주인 아저씨 밥상에서 박군과 함께 먹었다. 주인 내외는 우리를 군대 나간 자기네 아들 같다며 식구들과 똑같이 대했다. 나는 아저씨를 도와서 반죽을 하거나 박군과 교대로 배달을 나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빵 상자를 열 개만 올려 놓아도 비틀거렸고 시내 지리를 잘 몰라서 헤매기도 했다. 밤에 부근 초등학교 운동장에 빈 나무상자를 잔뜩 쌓은 자전거를 끌고 나가 연습을 하기도 했다. 차츰 균형 잡는 것에 익숙해졌다. 소매점이나 학교는 직접 걸어다니며 지름길을 익혔다. 두어 달 지나서 박군과 나는 아저씨를 일에서 해방시켜 드릴 수가 있었다. 아저씨는 강력분 중력분 밀가루와 물, 효모, 이스트 가루, 소금, 설탕, 그리고 쇼트닝과 분유를 섞는 기초 배합만을 해주고 손을 떼면, 우리가 반 시간쯤 반죽하고 나서 보온으로 데워 둔 오븐 안에 넣어 부풀리기를 하고는 가스 빼기 반죽을 다시 하고, 이런 식으로 세 차례를 하는 동안에 얼굴과 이마에 땀이 흥건히 밴다. 아저씨가 날마다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사장 아주머니의 일도 우리가 맡았다. 팥을 삶아 으깨어 껍질을 체에 거르고 앙금을 가라앉혀서 설탕을 섞어 약한 불에 뭉근해질 때까지 오래 끓이면 빵에 넣을 팥소가 완성된다. 크림은 계란 노른자에 설탕과 미제 깡통 마가린을 조금 넣고 오랫동안 걸쭉해질 때까지 휘저어 준다. 한 겨울이 되자 앙꼬빵이나 크림빵보다는 역시 찐빵과 만두가 잘 나간다고 해서 우리도 그걸 만들자고 했건만 주인 내외는 일손이 너무 많이 든다고 겨울에는 한가하게 한 철 쉬는 것도 괜찮지 않으냐고 오히려 우리를 달랬다.

바람은 좀 불었지만 봄 기운이 완연한 삼월 초의 일요일에 나는 박군과 함께 촉석루 쪽으로 산보를 나갔다. 우리가 성내를 한 바퀴 돌아서 언덕을 내려오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다가 내게 다가와서 담뱃불을 빌렸다. 무심코 담배를 내밀었는데 그가 불을 붙이더니 담배를 내밀어 주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 그전에 칠원 장춘사 놀러온 일 있지요?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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