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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시청석에서 최조호칼럼|눈·코바로 박힌 민주주의기대|지금까지는 일그러진 얼굴만 봐|언로가 막히면 재대로 못자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소아과 의학에 관한 재미있는 해설서를 읽었다. 갓난 아기의 눈이 언제부터뜨이는지에 대해서는 아기마다물론 개인차가 있기도하는 모양이지만 의학적으로도 설이구구한듯하다.
세상에 막 태어난 아기의 눈은 보지못한다고 생각하는 의사가 있는가하면 신생아에 시력이 생기는 것은 생후 두달이 지난 뒤라고 적힌 소아과교과서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미국에선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한 일이있었다. 생후 10분정도가 지난 갓난 아기에게 방주걱 모양의 종이에 적당히, 사람의눈·눈썹·코·입등을 네 장그려서 보인다. 어떤 것은 입이 가로로 그려져 있지 않고 세로로 그려져있기도하고어떤 것은 코가 오른쪽 귀밑에 그려져 있기도 하나 오직 한장만은 이목구비를 똑바로 그려 놓는다.
이 네장의 그림을 차례로갓난 아기에게 보이면서 옆으로 움직여 갔더니 아기는 눈동자를 굴리며 쫓아 보다가 코가 딴데에 붙어 있거나 입이세로로 선 그림에는 거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오직 이목구비가 제대로 된 그림만을 열심히 노려보더라는 것이다.
갓난 아기의 눈이 본다는사실도 큰 발견이라 하겠으나 그보다도 세상에 나온지 10분 밖에 되지 않는 신생아가 사람의「얼굴」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라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10분전까지 자궁의 어둠속에 갇혀 있던 갓난 아기에게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러한것을 식별할수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철학자「칸트」가즐겨쓰던 말 그대로「아프리오리」한것 (선험적인 것) 이라 해서 좋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의학분야에 용회를 해서 매우 송구스러우나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데에 비유를 해보기 위해 잠깐 인용했을 따름이다.
해방이후 우리들 국민은 민주주의의 청사진을 그려보여준 여러가지 밥주걱 얼굴을 구경해 왔다. 눈을 감고 살라는 눈이 지워져버린 얼굴, 귀를 막고 살라는 귀가 지워져버린 얼굴, 또는 입을 봉하고 살라는 입이 지워져버린 얼굴의 그림 따위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형의 얼굴을 한 민주주의의 청사진에는 그때마다 그럴싸한 표제도 얹혀지곤 했다. 「북진통일」을 위한 민주주의, 「승공안보」를 위한 민주주의,「조국근대화」를 위한 민주주의, 「유신정치」 를 위한 민주주의등등이 그것이다.
「민주회복」 운운하고 떠들어대지만 우리가 언제 민주주의를 해보았어야 다시 회복할 민주주의고 무어고 있지, 지난날에는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살았고 그 이전에는 위로 군주폐하를 모신 대한제국인데 민주주의의 꽁무니나마진작 구경해본 일이 있느냐하는 말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국민은 얼마전까지도 자궁의 따뜻한 어둠보다 더욱 어둡고 괴로운 일제 식민지 치하에 묻혀있다가 해방되자마자 시력이 있다 없다학설이 구구한 신생아의 「시력」으로도 그동안 전시된 기형의 민주주의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이목구비가 제대로 박힌 민주주의의 얼굴만을 애절하게 기리며 왔다. 그러고보면 민주주의의 진짜 가짜를 식별하는 국민의 인식능력도「아프리오리」한 것이라고 하여도 좋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우리들 국민은 어떠한 그럴싸한 명분으로도 귀를 막고 입을 봉하도록한, 이즈음 유행하는 말로는「언로」들 봉쇄한 기형의 민주주의를 진짜의 민주주의라고믿고 있지는 않다.
소아과의학에 관한 해설서에는 이에 관해서도 또다른재미있는 얘기를 소개해놓고있다.
지중해에 떠있는 가장 큰섬인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은 지금부터 7백∼8백년전에는 독일의 슈타우펜 황실의 지배를 받은 일이 있었다. 13세기 전반에 이 섬을 다스린 슈타우펜 가의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어도 못하고 불어밖에 몰랐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대왕과는 달리) 6개국어에 숙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어학에 능한 황제는 다른 한편으론 괴상한 언어관을 미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에 나올때 사람들 본래의 언어를 가지고 태어나며 그 본래의언어란 헤브라이어라고 그는믿고 있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은 그는 시칠리아섬에서 새로 아기를 가진한때의 어버이들을 모아서 그들이 아무말도 하지않고 입을 다문채 갓난 아기를 기르도록 업한 명령을 내렸다.
이처럼 어버이들이 침묵을하게되면 그 밑에서 자라난 아기들은 저절로 사람들 본래의 말을
익혀 헤브라이어를지껄이게 되리라고 「프리드리히」2세는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황제의 기대와는 달리 이「믿거나 말거나」투의 진기한 실험의 대상이 된 아기들은 모두가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아기들에게 어버이들이 말을 걸어 애정을 표시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정서장애를 일으킨 것이 그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풀이되고 있다.
부모와 자식사이에도 말을하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성립되지 않아 아기가 죽어간다는 것은 자? 심각한 얘기다. 그것은 언로가 차단되면인간의 기본적인 관계조차 파괴되고 만다는 참 무서운 얘기이기도하다.
하물며 언로가 막힌 곳에국민과 정부사이의 민주주의적인 정치관계가 성립될 수가 있을 것인가? 게다가 우리들 국민은 말을 못 알아듣고 발을 할줄 모르는 갓난 아기가 아니다.
국내외의 초조한 주시속에「서울의 봄」이 이번만은 이목구비가 제대로 박힌 진짜민주주의의 신생아를 분만할것이라 기대되고 있다. 우리는우선 그 신생아의 입이 제대로 수평적으로 째어져 있는지, 혹은 수직적으로 뒤틀어져있는지부터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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