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주택시장 붕괴로 겪은 고통, 위기는 또 온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3호 11면

7일 개봉하는 영화 ‘라스트 홈’의 한 장면.

어려운 경제 용어라면 질색인 사람이라도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에 대해서는 안다. 정확한 원인이야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고통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어서다. 그만큼 당시 금융 위기는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7일 개봉하는 영화 ‘라스트 홈’(라민 바흐러니 감독)은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집을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2010년 ‘인사이드 잡’(찰스 퍼거슨 감독)이 나온 이후 ‘마진 콜: 24시간, 조작된 진실’(2011, J C 챈더 감독), ‘빅쇼트’(1월 21일 개봉, 애덤 매케이 감독)에 이어 또 한번 금융 위기를 소재로 한 영화다. 10년이 다 돼 가는 일인데도 당시 재앙을 다룬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정상윤 금융전문가는 “그 배경에는 세계적 규모의 금융 위기가 또다시 올 것이란 불안감이 깔려 있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는 보통 10년 주기로 반복돼 왔는데, 현재 경제 상황이 답답한 것도 이 예측에 힘이 실리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생산인구가 줄고 잠재성장률은 떨어지는데 부채는 늘어나는 주요 선진국의 상황을 볼 때 ‘2008 금융 위기’가 결코 옛날 일이 아니란 뜻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베트남전이나 9·11 테러처럼 사회에 큰 상흔을 남긴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자정 능력은 미국 영화계의 큰 강점이다. 아직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금융 위기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고 언제든 비슷한 일이 터질 수 있기에 과거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당시 위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그린 영화들을 지금 여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수천만 명이 예금·집·직장 잃어”시작은 할리우드 톱스타 맷 데이먼이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 ‘인사이드 잡’이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이 작품은 “2008년 세계 경제위기로 수천만 명의 사람이 그들의 예금, 직장 그리고 집을 잃었다”는 자막으로 문을 연다. 그 위기의 진앙에 있던 월스트리트 금융인은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상·하원 의원들, 미국과 유럽 국가의 정부 고위급 인사, 학자, 언론인 그리고 금융인을 상대했던 매춘부까지 수많은 사람의 인터뷰를 담았다. 여기에 적확한 자료를 더해 그 원인을 샅샅이 파헤친다.


이야기는 단순히 ‘은행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택 담보 대출을 남발하고, 부실한 금융파생상품을 팔았기 때문이다’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바닥까지 파고든다.


1980년대부터 각종 규제가 완화되며 금융업이 융성하기 시작했고, 그게 바탕이 돼 90년대 초반 주택 담보 대출을 뼈대로 한 파생상품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미국 제조업이 악화 일로를 걸으며 중산층이 몰락하자, 이들이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부추긴 정부 정책도 한몫했다.


2008년 9월 15일 결국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위기는 도미노처럼 퍼져갔다. 결과는 끔찍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구제 금융에 7000억 달러를 썼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파악하고 싶은 이들에게 가히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월가 고액 연봉자의 탐욕 그린 ‘마진 콜’그렇다면 월스트리트,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리먼 사태 하루 전, 한 대형 투자회사의 24시간을 다룬 ‘마진 콜’은 그에 대한 답이다. 상황을 직감하고 교묘하게 살아남은 금융인들의 이야기다. 내부자들의 심리적 갈등을 아주 유려하게 담아내는데, 상상 이상의 고액 연봉을 받고 있는 이들의 탐욕과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치밀한 묘사로 찬사받은 J C 챈더 감독은 “40년간 메릴린치에서 일한 아버지 덕에 금융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그들의 관심사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래전부터 이 재앙을 예측한 ‘월스트리트의 아웃사이더’들도 있었다. 미국 은행들이 돈 잔치를 벌이고 있던 2005년 금융 위기가 올 것임을 미리 알아챈 네 명의 괴짜가 주인공인 ‘빅쇼트’가 그런 얘기다. 실화가 바탕인 이 영화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다. 헤지펀드 대표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 펀드 매니저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 등은 곧 다가올 엄청난 재앙을 각자의 방식으로 꿰뚫어 본다.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훑어보고, 직접 부동산 시장을 찾아 둘러보며 어마어마한 거품을 확인한 것이다. 영화는 이들이 주택 시장 폭락에 거액을 거는 과정을 통해 당시 월스트리트의 멍청함과 교만함을 폭로한다.


어려운 금융관련 용어를 무척 쉽게 설명한다는 점이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가령 다양한 담보자산을 한데 묶은 부채담보부증권(CDO)을 설명하기 위해 세계적인 셰프 앤서니 부르댕이 직접 등장한다. “셰프가 생선 요리를 하는데 그날 남은 생선들이 있겠죠. 이걸 그냥 버릴까요? 아닙니다. 다 모아서 스튜 재료로 쓰죠. 생선의 상태가 어떤지 손님들은 당연히 모릅니다. 다만 새로운 메뉴(CDO)일 뿐이니까요.”


집까지 뺏긴 사람들 이야기 ‘라스트 홈’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집을 빼앗긴 사람들이 남았다. ‘라스트 홈’은 앞의 영화들과 달리 철저히 피해자에 집중한다. 싱글대디 데니스(앤드루 가필드)는 주택 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해 모텔촌으로 쫓겨난다. 돈을 벌기 위해 부동산 브로커 릭(마이클 섀넌) 밑에서 일하며 집을 빼앗는 일을 하게 된 데니스. 영화는 그의 눈을 통해 집을 빼앗고, 빼앗기는 과정을 연속해서 건조하게 그린다.


딜레마에 빠진 데니스의 시선 끝에는 릭이 있다. 대란을 틈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릭은 말한다. “평생 막일하면서 정직하게 산 대가가 지금 뭔가? 미국은 패배자들을 위해주지 않아.”


이는 미국뿐 아니며 2008년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기에 폐부를 파고든다. 영화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빼앗는 자가 되는 것은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넘어선다. ‘대체 왜 이 모든 죄책감과 책임이 각 개인의 몫이어야 하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8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지금을 직시하게 한다.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금융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영화뿐 아니다. 그 사건을 계기 삼은 이야기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현 자본주의의 금융 시스템이 무척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조만간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