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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선택지, 그리고 김현수의 선택지

중앙일보

입력

메이저리그(MLB) 시범경기에서 부진했던 김현수(28·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결국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최후의 카드'였던 마이너리그 강등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김현수의 에이전시인 리코스포츠는 1일 "김현수가 볼티모어의 마이너리그행 요청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메이저리그에서 도전을 계속하고 싶다는 뜻을 구단에 전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김현수는 지난해 12월 계약 당시 마이너리그 거부권 조항을 계약서에 넣어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김현수가 동의하지 않는 한 볼티모어는 그를 25인 로스터에서 제외할 수 없다.

리코스포츠는 "김현수는 기존 계약이 성실하게 이행되고 공정하게 출전 기회를 보장받아 볼티모어 구단에서 MLB 선수 생활을 원만하게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이너리그행을 수용하라"는 구단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 최근 말을 아껴온 김현수가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이날 김현수는 벅 쇼월터(60) 볼티모어 감독과 세 번째 면담을 했다. 쇼월터 감독은 "오늘은 새로운 뉴스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요일(3일) 정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5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정규시즌 개막전을 앞두고 있는 볼티모어는 현지 시각으로 3일 낮 12시(한국시각 4일 새벽 1시)까지 개막전에 참가할 25인의 로스터를 제출해야 한다.

지난달 27일 미국 매체 FOX스포츠를 통해 '한국 복귀설'이 제기된 이후 김현수와 볼티모어는 탁구 경기를 치르는 것처럼 공방을 주고 받았다. 물론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김현수다. 그는 시범경기에서 타율 0.182, 출루율 0.229, 장타율 0.182을 기록하며 부진했다. 초반 25타석에서 안타를 치지 못했다. 비록 첫 안타를 기록한 뒤 7경기에서 타율 0.421(19타수 8안타)를 기록했지만 장타가 한 개도 없었다. 또 볼넷 1개를 얻는 동안 삼진을 6개나 당하며 선구안에서도 합격점을 받지 못했다. 평균 이상이라던 좌익수 수비도 매끄럽지 못했다.

김현수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김현수는 노림수를 갖고 타석에 들어서는 스타일이 아니다. 들어오는 공을 보면서 좋은 공이라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평균 시속 8km가량 더 빠른 미국 투수들의 공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부진이 이어지면서 심리적인 압박도 받았다.

볼티모어 구단은 적응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는 약속을 먼저 깨뜨렸다. 현지 언론에 '한국 복귀설'을 흘리고, 절차와 예의를 생략한 언론 플레이로 김현수를 압박했다. 만약 납득할 수 있는 절충안을 제시했다면 김현수의 선택도 달랐을 수 있다. 그러나 볼티모어 구단은 설득하지 않고 그를 몰아붙이기만 했다.

이제 공은 볼티모어 쪽으로 넘어갔다. 2년치 연봉 700만 달러(약 79억원)를 지급한 뒤 김현수를 방출하거나 김현수의 뜻대로 개막전 로스터에 그를 포함시켜야 한다.

답답한 상황이건 맞지만 김현수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구단이 만약 방출을 결정할 경우 김현수는 연봉을 보장받고 미국이나 일본에서 새 구단을 찾거나 한국에 돌아 올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긴다. 볼티모어가 연봉을 대신 내주는 꼴이라 김현수를 영입하는 팀은 부담을 덜 수 있다.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해도 사이가 틀어진 볼티모어보다 다른 구단에 가서 승격 기회를 노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볼티모어가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김현수에게 80억원 가까운 거액을 선뜻 지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렇다면 김현수를 안고 가야한다. 이렇게 되면 김현수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김현수는 지난해 ‘쿠바산 계륵’으로 불렸던 알렉스 게레로(30·LA다저스)의 사례를 참고할 만 하다. 수비 포지션이 애매했던 게레로는 구단의 마이너리그행 요구를 거부하며 버텼고 결국 106경기에 출전해 타율 0.233, 11홈런 36타점을 기록했다.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어도 주어진 기회를 잘 살려 결과적으로 팀에 보탬이 됐다.

대니얼 김 MLB 해설위원은 "아직 볼티모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부딪혀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만약 잔류하게 된다면 제한된 기회 속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팀을 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럴 때일 수록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댄 듀켓(58) 단장은 이날 "우리는 김현수를 영입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김현수가 볼티모어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부족했다"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여전히 설득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제 공은 볼티모어 구단에 넘어갔다.

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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