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시인>|김종삼의 『북치는 소년』『물통』|김광규의 『이사장에게 묻는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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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작년 연말, 한국시의 한 극단을 걸은 시인 김종삼씨가 타계했을 때 한두 예외를 빼고 대부분 신문의 문화면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의 충격이 아직생생하다. 시인의 바탕을 김종삼씨처럼 타고난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이 실제로 이룩한 「여백의 미학」은 앞으로 한국시의 한 표본으로 남을 것이다.
문학지들도 대체로 침묵을 지킨 셈이다. 『한국문학』만이 「김종삼 추모특집」을 꾸며 고인의 삶과 시세계를 음미하게 해주었다. 그의 시 『북치는 소년』을 읽어보자.
내용없는 아픔다움처럼/가난한 아회에게 온/서양 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어린 양들의 등성치는 그림을 보고 있다. 그는 생소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 생소함과 아름다움의 동시적인 표현이 「내용없는 아름다움」인 것이고 그것을 밀어주는 두 개의 이미지 이외에 나머지는 여백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는 또 무소유에서 오는 편안함과 광채가 있다.
쉽게 찾을수 있는『물통』의 다음 귀절은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길어다준 일밖에 없다고>
한 독특한 시인이 갔다. 그의 특집을 읽으며 다시금 그의 명복을 빌고 싶다.
같은 잡지에 실린 김광규씨의 『이사장에게 묻는 말』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목고리를 듣는다.
아침마다 승마를 하고/주말에는 골프를 치면서/요즘에도 당신은 퇴역사성장군은/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적 아니면 동지라고 /믿고 있는가(제2연).
그의 시에는 준렬함이 있다. 그 준렬함은 그러나 목소리의 높고 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꿰뚫는 시선의 예리함에서 온다. 그 예리함은 늘 대상의 핵에까지 접근한다.
이 시의 경우에는 마지막 구절의 <그리고 지금은 이사장이 된 당신 자신은 도대체 동지인가 적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을 때까지 접근하는 것이다. 그물음은 우리의 시선을 심화시켜 다시 삶의 현장에로 되돌려 준다.
양채영의 『풀』과 『장다리꽃』(현대문학)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짧으므로 『풀』의 전문을 인용해보자.
바람이 불면 바람의 몸짓으로/비가 오면 비의 몸짓으로/비가오면 비의 몸짓으로/이 지상에서 떠나지 않을 모양이다./그는 누가 오시든/끝없는 존경으로 허리를 굽혀/이 지상의 참 얘기를 들려준다/소리없이 아주작은 몸짓으로….
이 시선도 깊이를 가진 시선이다. 그리고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동시에 보여주는 시선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화자의 따뜻한 마음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 따뜻함이야말로 <지상의 참 얘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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