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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번호 여론조사는 실패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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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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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호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

여론조사는 2002년 이후 한국 정치와 정당 개혁의 산물처럼 작용했다. 정당 민주주의와 정당-유권자 연계를 강화해주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 후 정당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론조사는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물론 여론조사는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다. 우선 자발성과 책임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참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여론조사라는 게 주어진 질문에 수동적으로 답변하는 것에 불과해 정치적 참여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당 약화’는 여론조사가 가져오는 치명적 약점이다. 허수(虛數) 당원과 동원(動員) 당원이 양산되면서 ‘조직으로서의 정당’의 안정성은 크게 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임 정당정치’의 실현도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여론조사가 정당의 공직후보 추천 과정에 사용되게 된 데는 충분한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유권자와 당원의 정치 참여가 계속 낮아졌기 때문이다. 투표율은 하락세였고 당원의 참여도 그랬다. 진성(眞性) 당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당정치를 둘러싼 환경 변화라는 시대적 추세도 여론조사 활성화에 기여했다. 디지털 시대에서 ‘조직으로서의 정당’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고 ‘유권자 마음속의 정당’은 점점 영역을 넓혀왔기 때문이다. 당원 중심의 정당에서 지지자 중심 정당으로의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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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이후 여론조사를 통한 정치적 의사결정이 많아지면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동원과 조작 가능성’이었다. 여론조사 경선 후 “한 지역구에서 당원 200~300명이 집과 사무실 전화를 착신 전환시키면 지지율을 10% 높일 수 있다”는 증언이 뒤따랐다. “반납 전화와 해지 전화까지 사들여 수십 개의 전화번호를 착신 전환하기도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렇다면 여론조사를 통한 경선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 어떤 패자도 경선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 지지의 차이가 아니라 조직 동원 역량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총선부터 도입한 것이 ‘안심번호’를 이용한 여론조사다. 안심번호의 가장 큰 목적은 여론조사의 대표성·정확성, 그리고 신뢰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안심번호는 휴대전화 사용자의 개인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이동통신 사업자가 임의번호를 부여하는 제도다. 선거관리위원회 관리 아래 새누리당은 2개 여론조사 기관에서 지지층 1000명, 무당층 2000명의 응답 결과를, 더불어민주당은 선거구당 5만 명의 안심번호를 추출해 300명 이상 응답한 경우를 이번 공천 경선에 활용했다.

그렇다면 안심번호 여론조사 경선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결론부터 말해 그렇지 않다. 정치 신인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공정 경쟁의 기회를 주는 데 실패했다. 새누리당이 경선을 실시한 141곳에서 승리한 후보 대부분은 현직 의원이거나 당협위원장이다. ‘상향식 공천’을 내세웠지만 현실은 현직 재공천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새누리당의 경우 현직 의원 생환율은 70%에 이른다. 지역구 의원만 놓고 보면 78%에 달한다. 지역구 공천에 도전한 비례대표 의원의 경우 생환율이 22%에 불과한 것을 보면 지역에서 후보가 얼마나 알려져 있느냐가 결정적이었다. 여론조사 경선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을 역임한 후보들이 강세를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론조사는 인지도와 지명도 조사였던 셈이다.

안심번호 여론조사 경선이 이전 여론조사 경선에 비해 안전성과 신뢰성을 높인 것은 맞다. 조직적 동원 가능성도 상당 부분 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심번호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여론조사가 갖는 근본적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 기술적 문제도 여전했다. 번호 누락과 중복 전화 논란이다. “1차 투표에서 전화를 받지 못했는데 결선투표 전화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30여 명 나타난 지역도 있다. 새누리당만 여론조사 경선 등에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탄원서가 접수된 지역이 9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여론조사 문항과 결과가 비공개 처리된 것도 문제다. “공천위가 여론조사를 조작했다”는 괴담이 떠돌아도 이를 아니라고 할 근거가 마땅치 않다. 모든 게 공개되지 않고 오직 최종 승자만 발표됐기 때문이다. 시간도 부족했고 준비도 부족한 여론조사 경선이기도 했다. 새누리당 공천위 여론조사소위 위원장조차 “전화로 두 개의 이력을 불러주고 유권자에게 후보를 선택하라는 것은 참 무리한 요구”라고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후보자를 비교해 선택한다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론조사는 정당이 제한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공천의 최종적 책임자는 정당이고 공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선거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게 책임 정당제이고 대의제 성공의 전제조건이다. 동시에 최소한 선거 일정 시기 전에 해당 선거의 공천 일정과 방식이 미리 정해지고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는 한 확정된 일정과 방식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정당 공천을 일정 시기까지 완료되도록 법으로라도 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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