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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에 남풍 불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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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30면

누군가 말했다.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것이 아니고 꽃이 피니 봄이 온다”고...


삼월 초순 청록색 쪽빛바다가 여울지는 남해 바닷가 근처에 망운산 수광암을 찾았다. 대숲이 맑고 푸른 것을 보니 스님들이 공부를 잘하는가 싶다. 옛 말에 ‘그 절’ 스님들이 공부를 잘하는가를 보려면 주변에 소나무를 보면 안다고 했다. 소나무가 쭉쭉 뻗어 있으면 공부를 잘 하는 것이라는 말들이 전해진다.


1000일 기도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정초의 좋은 날에 장(醬)을 담근다기에 봄맞이할 겸 찾아 갔다. 한겨울의 동백 대신 어느새 제자리를 물려받은 2월 매화가 까칠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 속살을 보여주는 붉은 매화는 가슴을 반쯤 열어젖힌 모습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부끄럽기까지 하게 한다. 아침에 그곳을 가기 위해 출발을 서둘렀지만 점심이 훨씬 넘어서야 도착했다. 스님은 그때까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은 선배 스님에게 배운 장 담그기 비법을 신도들과 함께 했다. 고전의 문헌까지 찾아가며 알아 낸 우리 몸에 최고로 좋은 된장과 간장은 한약재와 마늘 죽염 등을 섞어 메주를 넣는 비법이었다.


가곡 ‘남촌’에서도 4월이면 진달래 향기, 5월에는 밀·보리 익은 냄새를 노래했던 것처럼 삶은 자신의 사는 모습에서 꽃을 피운다. 장 담그기 시연을 마친 스님은 약속이나 한 듯, 옆 동네 하동의 비구니 스님 암자로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다들 하루 놀기를 즐겨 하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드디어 우린 섬진강의 물그림자를 따라 하동 쌍계산 인근 지리산 골자기를 돌아 작고 아담한 황토흙집 절 미서암에 도착했다. 그곳에도 매화꽃이 담벼락에 의지해 햇볕을 쬐고 있다 우릴 반겼다.


박경리의 ‘토지 문학관’이 큰 논밭 건너편에 있다는 마을을 돌아오는 산모퉁이에 있는 암자는 정갈하고 단아했다. 스님이 따라주는 차를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다 흥이 났던지 마을거사님까지 어느새 12명으로 대중이 늘어났고, 돌아가며 차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비구니 스님은 선방에서 기도하며 불렀다는 시 낭송을, 우린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해바라기의 노래를 불렀고, 남자 스님은 ‘강물에 흘러가는 강물을 보라 아이야’ 하는 노래를 불렀다.


내 차례가 되어 답가로 부른 노래는 가곡 ‘남촌’.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기에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이 노래는 음률이 흔들렸다. 마치 열여덟 살의 청년처럼, 가슴 가득히 분위기에 취했기 때문이다. 매화꽃 반개한 날 초저녁, 지리산 자락 산동네에서 보낸 어른들의 봄 소풍은 밤이 돼서야 서로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헤어짐은 만남을 기약하듯, 봄의 손님과 주인은 이래서 좋다. 많이 듣던 옛말에 ‘수처작주(隨處作主)’라 말이 있는데, 머무는 곳이 어디든 사람의 향기와 꽃을 꽃피우라는 화두이다. 꽃 향기 길을 메우는 봄철에는 어디든 떠나라. 사람이 그리운 사람들은 겨울을 강물에 띄워 보낸 봄꽃이 마중하리라.


정은광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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