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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냉전의 습격을 알린 고발장…위대한 리더십은 촌철살인 언어로 작동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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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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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쳐졌다.” 처칠 조각상 받침돌 문구.

말은 세상을 장악한다. ‘철(鐵)의 장막(帳幕)(Iron Curtain)’-. 그 말은 20세기 후반 국제질서를 상징한다. 그 언어의 생산자는 윈스턴 처칠(Winston S. Churchill). 처칠은 스탈린(Stalin)의 공산주의 야욕을 폭로했다. ‘철의 장막’ 연설은 냉전(冷戰·Cold War) 의 습격을 알렸다. 연설 시점은 1946년 3월 5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개월 뒤다. 장소는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풀턴(Fulton)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학. 그때 처칠 신분은 전직 영국 총리. 나이 일흔 둘. 2016년, 올해가 연설 70주년이다. 나는 지난 1년 리더십과 말의 관계를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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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조각상-. ‘철의 장막’을 언급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했다. 처칠 동상들 중 가장 독특하다. 미국 풀턴의 웨스트민스터 대학 ‘처칠 박물관’ 앞에 있다(2011년 제막). [사진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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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조각상 앞에 선 박보균 대기자.

미 주리주의 대표 도시 세인트루이스. 공항에서 차를 빌려 고속도로(I-70)를 달렸다. 미국 중서부 풍광은 단순하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Hemingway)의 말이 떠오른다. “뉴욕의 동부에서 중, 서부로 갈수록 글과 말은 단순해진다.” 두 시간쯤 지나 목적지 풀턴에 도착했다. 인구 1만2000명의 시골. 그곳 웨스트민스터 대학은 중서부의 명문 리버럴 아트 칼리지다.

[현장 속으로] 처칠 ‘철의 장막’ 연설 70주년, 미국 미주리주 풀턴을 가다

연설 현장은 독특한 기억의 장소다. 1960년대 대학 당국은 그곳을 역사 명소로 꾸몄다. 영국 런던에 있던 교회(St. Mary the Virgin, Aldermanbury)가 웨스트민스터 대학 캠퍼스로 이전됐다. 나치 독일 공습으로 파괴된 유서 깊은 교회다. 부서진 벽돌과 기둥이 옮겨왔다. 69년 교회는 캠퍼스에 복원됐다. 지하층에 ‘국립 처칠 박물관’이 생겼다.

박물관 입구에 이렇게 적혀 있다. ‘말과 인간’, ‘리더십과 처칠의 삶’-. 안내원의 설명은 흥미롭다. “박물관에는 처칠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그의 말과 함께 전시돼 있다. 철의 장막이란 20세기 기념비적 표현도 그속에 있다.” 처칠이 왜 이런 시골에 왔을까. 배경이 궁금하다. 안내문은 이렇다. “웨스트민스터 대학 총장은 영국의 전 총리 처칠에게 명예박사를 제안하고 연설을 부탁했다. 트루먼(Harry Truman) 미국 대통령은 그 행사를 후원했다. 트루먼은 미주리주 출신이다. 처칠은 연설을 국제정세의 급변을 알리는 기회로 삼았다.”

유리박스 안에 연단과 의자가 놓여 있다. 박물관 킬러 콘텐트다. 70년 전 강연의 소품들이다. 벽에 작은 스크린이 있다. 나는 비디오 버튼을 눌렀다. 박사학위 차림의 처칠이 스크린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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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Stettin in the Baltic to Trieste in the Adriatic,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across the Continent.(발트해(海)의 슈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쳐졌다.)” 슈테틴은 폴란드의 슈체친(Szczecin), 트리에스테 항구는 이탈리아 땅이다. ‘아이언 커튼’(철의 장막) 부분에서 처칠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말들은 구체적이다. “그 선(線) 뒤로 중부와 동부 유럽 옛 나라의 수도, 바르샤바·베를린·프라하·비엔나·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부쿠레슈티·소피아가 있다. 이들 유명한 도시와 주민들은 소련의 세력권(Soviet sphere) 속에 있다. 그들 모두는 강력하면서 점증하는 모스크바의 통제 수단에 묶여 있다.” 처칠의 목소리는 단조로우면서 단호하다. 연설의 원래 제목은 ‘평화의 원동력’(Sinews of Peace). 그 말들은 냉전의 긴박했던 과거로 나를 밀어 넣는다. 냉전은 20세기 후반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의 공포의 대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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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캠퍼스 내 또 다른 처칠 동상. 그 뒤는 영국 런던에서 옮겨 복원한 교회 건물. [사진 박보균 대기자]

처칠의 발언은 강렬해진다. “공산당과 오열(五列)이 기독교 문명을 위협한다.” 그것은 역사적 고발장(告發狀)이다.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음모는 공산주의 팽창이다. 그는 철의 장막을 쳤다. 소련은 공산주의 종주국. 동유럽 지배의 진실이 감춰졌다. 스탈린 체제는 공포와 폐쇄다. 장막 뒤에선 잔혹한 숙청과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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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대원수 스탈린. 철의 장막은 스탈린의 음모를 겨냥했다. [사진 박보균 대기자]

말의 힘은 역사의 틀을 재구성한다. 자유민주주의 대(對) 공산주의, 반공(反共) 대 친공으로 나눠졌다. 전시실 유럽 지도는 흰색과 붉은색이다. 붉은색은 동유럽 공산위성국. 냉전의 판세는 선명하다. “철의 장막은 20세기 후반의 국제질서를 규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였다.”(미국 역사학자 필립 화이트 『Our Supreme Task』, 2012년)

처칠은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입은 붉은색 학위 가운, 모자가 진열돼 있다. 그 옆 사진은 처칠과 트루먼의 큰 웃음이다. 관광객 20여 명이 모였다. 안내자는 풀턴 시 역사학회 연구원 럭 프라이스(57). 나도 함께했다. 프라이스는 말한다. “트루먼과 처칠은 워싱턴~미주리까지 24시간 1600㎞의 열차여행을 했다. 둘은 열차에서 포커를 쳤고 트루먼이 75달러를 땄다. 하지만 진짜 승자는 처칠이다. 적은 돈을 내고 미국 대통령을 조연으로 둔 무대에 섰다.” 관광객들이 웃는다. 트루먼의 학력은 고교 졸업. 전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정치적 화려함은 없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성실과 신념, 실천과 투지의 지도자다. 그는 전쟁 때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했다. 2차 대전 후엔 스탈린과 대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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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처칠의 강연 소품인 연단과 의자. [사진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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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이 받은 명예박사 학위 가운과 모자. [사진 박보균 대기자]

웨스트민스터 대학 체육관에 2800여 청중이 모였다. 처칠 강연은 승부수였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고작 7개월 뒤다. 사람들은 전쟁에 지쳤다. 소련은 미·영과 동맹국이었다. 서방에선 친(親)소련 분위기가 존재했다. 처칠은 그 흐름을 깼다. 그것은 도전과 용기의 소산이다.”(필립 화이트 『Our Supreme Task』) 처칠의 삶은 용기로 단련됐다. 그는 용기를 리더십 자질의 으뜸으로 쳤다. 샌드허스트(Sandhurst) 사관학교 졸업 후 식민지 전선에 나갔다. 쿠바, 인도, 보어전쟁(남아프리카)에 참전했다. 보어전쟁 때 종군기자였다. 처칠은 포로가 됐다. 그는 탈출했다. 그 용기로 갈채를 받았다.

연설은 소련의 선제적 공세를 경고했다. 찬반논쟁과 비판이 이어졌다. 루스벨트의 미망인 엘리너(Eleanor)는 “남편의 이상과 이념을 훼손했다”고 반발했다. 언론인 월터 리프먼(Lippmann)은 “재앙적 실수”라고 했다. 소련 반응은 험악했다. 스탈린은 처칠을 “전쟁광(狂), 음해의 선동가”라고 비난했다. 유럽 다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실정에 둔감했다. 프랑스의 장폴 사르트르는 소련 체제의 잔혹한 인간성 말살을 외면했다.

연설 13개월 전인 1945년 2월 얄타(흑해 연안).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은 그곳에 모였다. 이들 미·영·소 지도자는 종전 후 세계질서를 짰다. 루스벨트는 처칠을 견제했다. 영국의 식민 제국주의 부활 가능성 때문이다. 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스탈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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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전직 총리 처칠(왼쪽)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워싱턴에서 미주리까지 탔던 특별열차에서 웃고 있다. [사진 박보균 대기자]

철의 장막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조어다. 크렘린의 이미지는 음모와 폐쇄, 공포로 낙인찍혔다. 나는 프라이스에게 물었다. “철의 장막이란 수사(修辭)는 절묘하다. 누가 작성했나.”- 그는 안내문을 근거로 설명한다. “처칠 혼자다. 스피치 라이터 팀은 없었다. 처칠은 노련했다(shrewdly). 그 말(아이언 커튼)을 처음엔 넣지 않았다. 충격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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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의 해군장관을 사직하고 육군 대대장으로 복귀한 처칠(제1차 세계대전). [사진 박보균 대기자]

전시실에 인상적인 설명문이 있다. “처칠의 문장구사력 , 특히 순간적인 경구(驚句)를 만드는 기량은 전설적이다. 그는 이 능력을 청중에게 연설 요점을 각인시키는 데 구사했으며, 상대편의 생각을 멈추게 하는 데 사용했다.”

처칠의 말과 글은 선천적 재능만이 아니다. 후천적 단련이 덧붙여졌다. 처칠은 명문가 귀족 출신이다. 아버지는 재무장관까지 지냈다. 처칠은 더듬거림과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그는 끈질긴 발성 연습으로 약점을 극복했다. 그는 끊임없이 책을 읽었다. 역사 감각을 키웠다.

처칠의 표현은 장엄해진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우리는 미래를 구할 힘을 갖고 있다.” 그는 ‘영어 사용 국민 사이의 특별한 관계, 미국과 영국의 단합을 호소했다. 그 선언은 역사의 전화점이다. ‘철의 장막’은 공산주의에 대한 역습이다. 트루먼은 반격에 나섰다. 1947년 6월 마셜플랜, 서(西)베를린 물자 공수(空輸)작전, 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설립된다. 스탈린의 마수는 동북아로 뻗는다. 스탈린은 북한 김일성의 6·25 남침을 승인한다. 트루먼은 미군을 한반도에 급파했다. 한국은 적화(赤化)통일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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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Give In”(절대 굴복하지 말라). 제2차 세계대전 때(1941년 10월) 총리 처칠이 자신의 모교 해로우(Harrow)스쿨에서 했던 연설. [사진 박보균 대기자]

철의 장막은 지배적 용어다. “처칠은 서사시(敍事詩)적 어휘로 문제를 제기했고 냉전 시대에 신화적 의미를 확보했다.” 런던대 교수 존 램스덴(1947~2009)의 설명이다(『Man of the Century』,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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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된 히틀러 저서 『나의 투쟁』.[사진 박보균 대기자]

처칠의 연설은 묵시론(?示論)적 분위기를 띤다. “지난번(1930년대)에도 나는 그런 사태가 오는 것을 보고 동포와 세계를 향해 외쳤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사태’는 나치의 도발이다. 박물관에 나치 총통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1925년 간행)이 진열돼 있다. 그 책은 독일에선 70년간 금서(禁書)였다. 표지는 누렇게 바랬고 한쪽이 찢겨졌다. 책 속엔 나치의 광기(狂氣)가 남아 있는 듯하다. 유럽 언론은 대부분 그 책을 묵살했다. 처칠은 달랐다. “그 책이 히틀러의 솔직한 의도를 표출한 것으로 믿었다”(폴 존슨, 『처칠』, 2009년). 처칠은 “유럽의 공산화를 막아야 하지만 나치도 안 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영국 총리 체임벌린의 유화(宥和)정책은 기세를 올렸다. 처칠의 ‘무장(武裝)평화론’은 무시당했다.

그 시절 처칠은 정치 주류에서 밀려났다. 그의 삶은 파란과 곡절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그는 해군장관이었다. 하지만 터키의 갈리폴리 작전 실패로 사임했다. 그는 대대장으로 전선에 나갔다. 해군장관에서 참호 속 육군 중령-. 거친 굴곡이다. 그는 ‘정치 철새’로 비난받았다. 보수당→자유당→보수당 이적. 그의 이미지 한쪽은 이단(異端), 트러블 메이커로 각인됐다.

1939년 9월 독일 히틀러는 전쟁(2차 대전)을 시작했다. 처칠은 총리에 임명됐다. 사흘 후(40년 5월 13일) 의회 연설이 있었다.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외에 드릴 게 없다.” 그의 우선 목표는 비관의 퇴출이다. 히틀러는 이 무렵 대중연설 무대를 떠났다. 히틀러의 천부적인 선동은 들리지 않았다. 처칠은 낙관과 불굴의 언어를 생산했다. 그 말은 전염성이 강했다.

40년 6월 독일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다. 처칠은 셰익스피어적 어휘를 내놓았다. “대영제국이 천년간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지금이 그들의 가장 멋진 시간이었다(This was their finest hour).” 그 말은 힘과 매력을 발산했다. 국민적 항전 의지는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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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풀턴, 그곳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철의 장막』 용어가 등장했다. [사진 박보균 대기자]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시절, 냉전은 격화됐다.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핵 공포의 결정판이다. 63년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2차 대전 때) 영국이 홀로 버티던 어두운 날과 실의(失意)의 밤에 처칠은 언어를 동원해(mobilized) 그것을 전선에 보냈다.” 처칠의 언어는 비밀 병기다.

|처칠의 연설 46년 뒤에
고르비, 같은 장소에서
냉전 드라마 종식 선언

“처칠은 말의 힘을 이해하고 휘둘렀다. 말은 그의 가장 설득력 있는 무기였다.” 처칠의 공식 전기 작가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1936~2015)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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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의 전직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1992년 5월 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배경은 베를린 장벽 잔해로 꾸민 설치 조각 ‘돌파구’.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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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의 전직 대통령 고르바초프

리더십은 말이다. 위대한 리더십은 언어로 작동한다. 말은 대중의 상상력을 장악한다. 역사의 전진에 국민의 동참을 끌어낸다. 처칠의 말은 위기 때 명쾌했다. 처칠은 중립의 기회주의적 말을 싫어했다. 성공적인 위기 관리는 언어의 회색지대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1980년대 미국 대통령 레이건(Ronald Reagan)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했다. 그 상징적 언어는 냉전의 승리를 낚아챘다.

3김 정치의 위력은 언어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그 구절은 민주화의 확신을 전파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서생(書生)적 문제 인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말했다. 지도자 덕목은 이상과 현실의 조화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말로 세상을 바꿨다. 그의 ‘근대화, 민족중흥’은 산업화의 국가개조를 이끌었다. JP는 1966년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연설을 했다. 그림(봉산탈춤)도 기증했다. 지금 한국 정치의 말은 어설프다. 격조는 떨어지고 실천은 미흡하다. 경륜의 빈곤과 비전의 결핍은 언어에서 드러난다.

처칠은 2차대전 종전 한 달 전(1945년 7월) 총선에서 패배했다. 노동당 애틀리(Attlee)에게 정권을 넘겼다. 처칠은 정계 은퇴의 처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술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처칠의 신조다.”(존 램스덴 『Man of the Century』) 풀턴 연설은 재기의 발판이 됐다. 보수당은 51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한다. 처칠은 두 번째 총리(77세)를 맡았다.

처칠의 언어 유산은 계승됐다. ‘영어사용국의 특별한 관계’는 35년 뒤 작동한다. 레이건과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Thatcher)는 베를린 장벽 붕괴에 나섰다. 전시실에 두 사람 사진이 있다. 처칠의 글귀도 있다. “비판은 쉽다. 성취는 어렵다.(Criticism is easy; achievement is difficult.)” 레이건의 군비 경쟁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는 소련을 무너뜨렸다. 대통령 박정희의 산업화는 비판과 냉소를 받았다. 그는 최빈국(最貧國) 대한민국을 바꿨다. 한강의 기적이다.

전시실에 컵과 도자기들이 있다. 시가를 문 불도그 이미지의 처칠을 형상화했다.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 처칠만큼 웃음을 주거나 웃음거리가 된 사람은 없다.”(폴 존슨 『처칠』) 처칠은 유머의 위력을 알았다. 카리스마는 유머로 강렬해진다.

나는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입구 한쪽에 ‘철의 장막’ 조각상이 있다. 처칠이 ‘철의 장막’을 말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미주리 출신 조각가 위건드(Don Wiegand)의 2011년 작품이다. 처칠 조각상 중 가장 독특하다. 조각가는 ‘진실의 순간’을 포착했다.

처칠 동상은 박물관 위쪽 캠퍼스에도 있다(1964년 건립). 오른손에 지팡이, 왼손에 모자를 움켜쥐었다. 처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동상에 처칠 어록이 새겨져 있다. “In war=Resolution, In Defeat=Defiance, In Victory=Magnanimity, In peace=Good Will(전쟁에는 결단, 패배에는 투혼, 승리에는 관용, 평화에는 선의).” 결단과 투혼은 2차대전 승리의 바탕이다.

그 옆에 베를린 장벽의 잔해 여덟 개가 서 있다. 처칠의 외손녀인 미술가 샌디스(Celia Sandys)의 설치작품. 제목은 ‘Breakthrough’(돌파구, 높이 3.5m 길이 9.8m). 원색의 그라피티(낙서)가 눈길을 끈다. ‘unwahr’(거짓)-. 그 말은 공산 통치의 어두움을 압축한다. 소련 붕괴 다섯 달 뒤인 1992년 5월.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이곳에 왔다. “우리는 냉전 드라마를 전달하는 상상력과 환상의 조각 앞에 서 있다”고 했다. 그는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우리가 스스로를 몰아넣었던 악순환을 분쇄한 것이다.”

1946년 냉전의 개막을 알린 ‘철의 장막’선언, 46년 뒤 같은 장소에서 냉전의 종식 발언-. 나는 극적 장면을 정리했다. “베를린 장벽은 철의 장막의 실체다. 그 구조물의 잔해들이 역사 예술로 장식됐다. 그 잔해들은 냉전의 와해를 상징한다. 언어가 연출한 역사다.”

처칠의 언어는 승리했다. 그는 말의 거장(巨匠)이다. 그는 단언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속하는 유일한 것은 말(Words)이다.”

미국 미주리주 풀턴=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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