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워킹맘의 분노…'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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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 글에 공감한 워킹맘들이 지난 9일 시오자키 야스히사 후생노동상에게 보육원 대기 아동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서명 명부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지지통신]

도쿄에 사는 30대 초의 워킹맘 A씨. 육아 휴직 중인 그는 한 살 난 아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다음달 직장에 복귀하려다 벽에 부딪혔다. 주변의 모든 보육시설에 신청서를 냈지만 허사였다. 친정은 멀고 주변에 기댈 사람도 없었다.

그는 한 블로그에 익명의 글을 올렸다. 내용은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는 제목 만큼 거칠고 신랄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내건 1억 총활약사회부터 비꼬았다. “도대체 뭐야 일본. 1억 총활약사회 아닌가. 어제 보기 좋게 보육원 탈락했어. 내가 활약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직격탄을 날렸다. “올림픽에 수백억 엔 낭비했네. 엠블럼은 어떻게든 좋으니 보육원 만들어요. 유명 디자이너에 줄 돈 있으면 보육원 만들어요. 나라가 애 낳지 못하게 하면 어떡하나. 적당히 해라 일본.”

글은 순식간에 퍼졌고 댓글이 줄을 이었다. 언론도 큰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아베 내각의 안이한 태도였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국회에서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답변했다. 1.4인 합계출산율(15~49세 가임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을 1.8로 올리기 위해 ‘꿈을 만드는 양육 지원’을 2단계 아베노믹스(아베 경제정책)의 핵심으로 삼은 그였다.

A씨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SNS에서 ‘#보육원 떨어진 것은 바로 나다’는 해시태그 운동이 펼쳐졌고, 지난 5일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같은 글귀가 든 피켓 시위를 벌어졌다. 지난 9일에는 2만8000여명이 서명한 명부가 주무장관인 시오자키 야스히사(鹽崎恭久) 후생노동상에 전달됐다.

정치권에선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지난해 4월 현재 일본의 보육원 대기 아동은 2만3000여명으로 전년보다 1700여명 늘었다. 아베 내각은 지난해 말 50만 명분의 보육원 시설을 증설하겠다고 밝혔지만 사업 주체가 대부분 기초단체여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자민당은 지난 11일 긴급 대책팀을 만들었고, 보육원 설치 기준 완화 등 검토에 나섰다.

자민당은 오는 7월 참의원에서 이 문제가 상대적으로 심각한 도시 지역 여성의 반란표를 우려하고 있다. 가뜩이나 야당은 선거 협력에 의견을 모은 터다. 제 1야당 민주당도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대표를 본부장으로 하는 긴급대책본부를 설치했다. 자민당의 무신경을 비난하면서 워킹맘에 상냥한 정당 이미지를 만들어 여성표를 공략할 생각이다. ‘보육원 떨어졌다 정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익명의 워킹맘이 제기한 보육 대란은 참의원 선거의 큰 쟁점이 돼가고 있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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