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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지성과 통찰, 두 노작가의 매혹적인 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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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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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존, 디어 폴
폴 오스터, 존 M 쿳시 지음
송은주 옮김, 열린책들
336쪽, 1만3800원

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열린책들
368쪽, 1만3800원

지금은 덜하지만 폴 오스터(69)를 읽는 일이 세련된 문화 취향의 표지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추리소설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장르문학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소설 세계가 짜릿하면서도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 특히 ‘우연’이라는 요소를 적극 활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 의미심장했다. 사람은 흔히 지나온 자신의 인생 이력을 성숙이나 발전 과정으로 파악하고 싶어 하지만, 착각일 뿐 실은 의미 없는 일화나 일상의 반복이기 쉽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연적인 변수야말로 우리 삶의 구성원리라는 점에서다.

그런 오스터의 세계에 매료됐던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새 책 두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영어 원제가 ‘Report from the interior’인 『내면 보고서』는 어린 시설의 은밀한 성장 기록이다. 일기 같은 느낌을 준다. 『디어 존, 디어 폴』이 좀 더 흥미롭다. 디어 폴의 폴은 오스터 자신, 존은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남아공의 존 M 쿳시(76)다. 영화감독 경험도 있어 ‘대중문학’ 쪽에 좀 더 가까워 보이는 오스터와 ‘순수문학’의 정점에 서 있는 쿳시. 얼핏 둘의 조합은 잘 맞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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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左), 존 M 쿳시(右)

책은 2008년 7월부터 2011년 8월까지 두 사람이 팩스로 주고 받은 수십 통의 ‘우정 편지’를 모은 것이다. 작품 색깔, 일곱 살이라는 나이 차이까지 나는 두 사람은 책, 영화, 여행, 정치,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다를 토해낸다. 수준급 문화인들의 격의 없는 내면 토로다 보니(편지에는 내면이 드러나게 돼 있다!)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격조 있는 교양서 모양새다.

은빛 연륜에 이른 처지에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이 남사스러웠는지 두 사람은 남자들에게 우정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생각부터 주고받는다. 쿳시가 먼저 “생명 없는 대상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언, “남자가 여자와 침대에 드는 이유는 대화하기 위해서다”라는 20세기 초 영국작가 포드 매덕스 포드의 발언 등을 꺼내 운을 뗀다. 이에 오스터가 오래 지속되는 최고의 우정은 존경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화답하자 쿳시는 존경심에 바탕한 유대 관계를 위해 남자들이 더 빨리 뛰고 더 멀리 공을 차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응답은 자연스럽게 스포츠에 대한 통찰과 상념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은 얼마나 많은 오후를 TV 스포츠를 보며 보냈는지 모른다며 나란히 탄식하고, 이스라엘의 잔인한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해 공분한다. 쿳시는 체스 승부에 사로잡혀 폐인 직전까지 갔던 일화를 털어 놓는다. 그들의 평범함에 위안을 얻고, 윤리적인 인생철학에 공감하게 된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S BOX] ‘고집불통 총기 옹호론자’ 오해 푼 찰턴 헤스턴과의 우연한 만남

폴 오스터는 존 쿳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거짓말 같은 ‘우연’ 체험을 소개한다. 1997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그는 영화제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수많은 감독·배우와 한 방에서 어울렸다고 한다. 모두가 흥분해 들뜬 초등학생들처럼 격의 없이 즐기다 보니 배우 찰턴 헤스턴과 얘기를 나누게 됐다는 것. 평소 그의 총기 규제 반대논리에는 신물이 났지만 만나 보니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 일주일 후쯤 미국 시카고 도서전에서 찰턴 헤스턴을 목격한 데 이어, 며칠 후 맨해튼의 한 호텔에서 다시 그와 마주쳤다는 것. 열흘 남짓한 동안 대륙을 옮겨다니며 같은 사람을 세 번 만난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오스터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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