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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물림 하는 가난] 극빈층 세명 중 한명 3代째 바닥생활 못벗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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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도시 빈민, 그들은 누구인가. 본지 조사에서 그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농부의 자식으로 출생-무작정 상경-노동.노점상 등에 전전-관절염 등 만성질환-기초생활보장 수급자 편입-제대로 못 키워 자식에게도 가난 대물림'.

서울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도시 빈민의 모습이다. 그들은 전.월세 비용에 짓눌려 산다. 안 아픈 사람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 가장 많다.

사정이 이러니 그들의 자식까지 좀처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본지는 2001년 4월 난곡 시리즈에 이어 '가난의 대물림' 실태를 조명하고 대안을 모색했다.(편집자)

권복순(75)할머니. 8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큰아들(53) 가족과 서울 중랑구 신내동의 영구 임대 아파트에서 산다. 아들은 고층건물의 유리 닦는 일을 한다. 그나마 겨울이나 장마철에는 일감이 없어 할머니 가족은 정부가 일정 금액을 매달 지원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됐다.

그 아래 딸(47) 역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다. 갑상선과 신장에 이상이 있어 취로사업에 나간다. 사위 역시 고층건물 유리 청소부다. 둘째딸(42)은 봉제 근로자, 사위는 조그마한 회사의 용달차를 몬다. 둘째아들(38)은 지체 장애인으로 유리창을 닦는다. 둘째딸과 둘째아들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아니지만 극빈층에 가깝다.

權할머니의 부모와 시부모는 충청도의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그는 농부였던 남편과 결혼해 공주에서 소작을 하거나 머슴살이를 했지만 영농자금을 갚지 못해 1980년대 중반 도망치듯 상경했다.

노동.가정부 등 온갖 궂은 일을 했지만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난이 3대(代)에 걸쳐 權할머니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비단 權할머니뿐 아니다. 극빈층 가운데 상당수의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의 3분의2 가량은 대를 이어 빈곤의 덫에 걸려 있다.

중앙일보와 한국사회보장학회는 올 초 삼성생명의 후원으로 서울 구로.상계.신림동 등 12개동의 기초생활보호 수급자 4백20가구를 면접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의 59.7%가 부모에게서 가난을 물려받았다고 밝혔다. 3분의1 가량(32.7%)은 할아버지 때부터 가난했다고 응답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장경섭(張慶燮)교수는 "80년대 들어 경제가 안정되면서 계층 상승의 기회가 줄어들어 빈곤이 고착화되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더욱 심해졌다"면서 "이대로 가다간 큰 사회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 격차도 벌어지고 있다. 2003년 1분기 통계청 도시가계 조사에 따르면 한달 사교육비는 저소득층(소득 기준 하위 10%)이 3만7천원에 불과한 반면 고소득층(상위 10%)은 6.3배인 23만4천원이었다.

이런 현상은 서울대 신입생에게도 나타난다. 농어민의 자식 비율이 71년 13.2%였으나 지난해에는 2.3%에 지나지 않았다. 30여년 만에 83% 줄었다.

물론 한국은 국제 기준(global standard)으로 보면 아직까지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많은 역동적인 나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빈곤의 세습화'가 앞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서울대 김상균 교수 등)은 말한다.

보건사회연구원 김미곤 박사는 "최소한 극빈층 자녀의 전문대 학비까지는 국가에서 보조해줘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이혜경 교수는 "보육 지원을 강화해 극빈층 부부의 맞벌이를 돕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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