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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우물 안 개구리인 조국 위해 교사 될 것"

미주중앙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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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월 7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실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인터뷰 기사 지면. 하단엔 도산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보인다.(왼쪽 사진) 지난 2001년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회장 홍명기)가 리버사이드 시민광장에 도산 동상을 세웠다. [사진 장태한 교수]

25세에 초등학교 다녀 화제 인물로
도산 반듯한 모습 "기품있다" 묘사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2년 미국 일간지와 한 인터뷰 기사가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소장 장태한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장 교수는 6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이 1902년 12월 7일자 11면에 도산의 인터뷰를 실은 사실을 확인하고, 지면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1865년 창간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현재도 발행되는 미 서부의 유력일간지다.

기사의 제목은 '한국, 잠자는 나라(Corea The Sleeping Land)'다. 전면 인터뷰 중 3분의2 가량은 "한국인은 귀신을 섬기며 여성은 자유가 없다"는 당시 국내사정이었다. 도산은 당시 25세였지만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이게 화제가 돼 현지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하게 됐다. 한국에서 2년간 의료선교 활동을 했던 알레산드로 드류 박사가 통역을 맡았다.

도산은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지금 한국 민족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렸을 땐 서양인을 악당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울에서 학교(구세학당)를 다니면서 서양인을 본 뒤 달라졌다. 외국에 나가면 행색이 초라하기 마련인데, 서울의 외국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본국은 얼마나 대단할까'라고 궁금해 했다"고 밝혔다.

도산은 "동포를 도우려면 외과의사가 되는 게 좋겠지만 마음이 약해 수술을 집도할 자신이 없다"며 "교사가 장래 희망"이라고 말했다. 또 "내가 여기서 보고 배운 모든 걸 한국으로 가져갈 순 없겠지만, 1000가지 중 단 하나만이라도 보석과 같은 핵심을 얻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후원을 받고 지인들이 도와줘 여비를 마련했다. 그들이 내게 보여준 신뢰에 대해 부담이 크다"고도 털어놓았다. 미국인 기자는 도산의 모습을 보고 "기품있다(dignified)"고 썼다.

도산학회 윤경로 회장은 "도산이 미국 신문과 인터뷰를 한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동안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며 "도산의 청년시절 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도산은 1902년 9월 4일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신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인천에서 기선을 탔다. 결혼한 지 넉 달 만이었다. 도쿄→하와이→샌프란시스코의 여정이었지만, 하와이에서 배를 잘못 갈아타 캐나다 밴쿠버로 갔다. 이후 시애틀을 거쳐 그해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빈털터리였던 그는 지인인 드류 박사를 차이나타운에서 우연히 만나 그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며 머물렀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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